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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트랑책이랑 Jan 19. 2024

우울 치료법

나의 우울은 새끼손가락 레몬색 크레파스!

우울이라는 녀석이 소리 소문 없이 찾아들 때가 있다. 이 녀석의 방문은 가끔 오겠거니, 하는 조짐이 먼저 있을 때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불쑥 일어나는 터에 매번 그 방문이 몹시 당황스럽다. 이번에도 그랬다. 어떻게든 이 불청객을 잘 타일러 돌려보내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지치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내게 맞고 그 손님에게도 맞는 맞춤형 방법을 탐색하고자 여러모로 노력해 보았다. 그러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려 보았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그 불청객은 떡하니 옆에 붙어 앉아 턱까지 괴고 내가 긋는 선 하나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안 되겠다, 포기를 하고 자리를 바꿔 앉아 일기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한참 일기를 쓰다가 오른손 새끼손가락 끝 마디 옆면에 레몬색 크레파스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어이 없어 웃음이 났다. 우울의 흔적이며 동시에 우울이라는 녀석을 어찌하면 떨쳐낼 수 있을까, 몸부림치던 내 숱한 노력의 흔적이, 그 녀석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도 예쁜 색깔로 내게 딱, 묻어 있었다. 순간 생각했다. 그래, 씻으면 된다. 그런데 왠지 씻고 싶지 않았다. 잠시 바라 보았다.

'너 참 예쁜 색이구나.'

잠시 그냥 두기로 했다. 일기를 다 쓰고 차를 끓이려고 일어났다가 전기 포트에서 물이 끓는 동안 싱크대에 담긴 그릇을 씻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려다 다시 새끼손가락을 본 순간,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설거지를 하다, 지워버린 것이다. 우울이라는 녀석이 이렇게 불쑥 가버렸다.

 

나는 앞으로, 우울이 나를 찾아올 때면 '내 새끼손가락에 묻어 있던 레몬색 크레파스'를 떠올릴 것이다. 나도 모르게 묻어 왔다가 나도 모르게 지워져 버리는 것. 그리고 내가 씻으면 씻어지겠지만 그 빛깔이 고와서 내가 잠시 그대로 두었던 것. 다음에 또 우울이 찾아오면 이제는 실험해 보아야겠다. 주문을 외우자!


나의 우울은 새끼손가락 레몬색 크레파스!


나의 우울은 새끼손가락 레몬색 크레파스, 내가 씻으면 지워지지만 잠시 둬도 괜찮은 것, 그리고 알아서 떠나가버릴 것.


202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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