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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랑 Nov 13. 2023

야구계 성불의 해에 대한 고찰

고통 뒤에 오는 기쁨



 몇 해 전이었다. 중남미를 여행하던 중, 뉴요커와 동행을 한 적이 있다. 그는 금발에 벽안을 가진 백인으로, 당시 로스쿨에 재학 중이었다. 거기다 뉴욕의 부촌인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산다고 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응원하는 스포츠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뉴욕 메츠를 응원해.” 그의 배경으로 보건대, 당연히 부유한 팀인 뉴욕 양키즈를 응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대답이었다. “어쩌다 그렇게 됐어?”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고통을 좋아하거든….” 그는 옅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어쩐지 무척 슬퍼 보였다.


 2010년 7월 29일이었다. 날짜까지 잊을 수가 없다. 친구의 메시지를 받았다. 지금 야구 경기 중인데, 광주 연고의 팀인 기아 타이거즈가 이긴다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야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선물에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야구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텔레비전을 틀자마자 갑자기 기아 선수들이 연달아 홈런을 치기 시작했다. 스리런, 투런, 솔로포, 만루 홈런까지 한 회에 일어난 일이었다. 왜인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 이제 더 이상 선물은 필요 없어졌다. 운명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 정도의 드라마틱한 첫 만남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아 타이거즈의 팬이 되기로 했다.


 강렬한 첫인상과는 다르게 타이거즈는 정말 못하는 팀이었다. 못 한다는 말이 너무하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정말 못했으니까. 8회까지 이기다가 9회에서 허망하게 역전패당하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우리 팀 투수들은 언제나 상대편 타자들을 어떤 공이 와도 칠 수 있는 강타선으로 만들어 주었다. 반면에 우리 팀 타자들은 언제나 상대편 투수들을 도저히 칠 수 없는 마구를 던지는 최강 선발진으로 만들어 주었다. 야구를 보면서 종종 혈압이 올랐다. 진심으로 건강이 안 좋아짐을 느꼈다. 그리고 야구를 보면서 다른 인격이 생겼다. 야구를 볼 때면, 코스모스같이 여리던 내가 갱스터처럼 쉼 없이 욕을 하게 되었으니까.


 정신적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휴지기를 가졌다. 그렇게 야구에 관심을 끊은 지 몇 해가 지났다. 기아 타이거즈의 팬인 언니가 연락을 해왔다. 우리 팀이 우승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줄 알았는데 기록을 찾아보니 진짜 일등이었다. 숨겨왔던 팬심이 되살아났다. 운이 좋게도 서울에서 하는 경기의 티켓은 다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아는 우승했다. 9년 만이었다. 선수들도 울고, 팬들도 울고, 나도 울었다. 그날은 평일이었지만 내일이 없는 것처럼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셨다. 처음 보는 기아 팬들과 함께…. 우리는 그날 형제자매였다. 끓어오르는 가족애와 전우애. 우리의 팀이 승리한 것이다.


 물론 매해 좋은 성적을 내는 상위권의 팀들도 우승이 기쁠 것이다. 하지만 감히 부진하던 팀의 승리가 더 기쁠 것이라고 생각한다. 9년 동안 제대로 가을 야구도 못 하던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이, 몇 해가 지나도 바래지 않는 행복한 기억으로 남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정상을 밟아보지 못한 9년어치만큼이나 기뻤다. 100년 동안 우승하지 못한 것으로 유명한 시카고 컵스가 우승컵을 들었을 때는 이역만리의 한국 사람들도 박수를 쳤다. 그리고 시카고 컵스의 팬들은 설움에 잠 못 이루던 100년어치만큼 기뻤을 것이다. 1회 운전면허에 떨어지고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했을 때, 나는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운전면허 재시험 응시료인 11만 원어치만큼 기뻤다.


 그러고 보니 메츠를 응원하던 뉴요커는 그 사실을 알았던 모양이다. 고통 끝에 오는 기쁨은 정말 크다는 것을 말이다.


 이 글을 쓰며 찾아보니 메츠는 아직도 우승 소식이 없다. 하지만 고통 끝의 우승은 더욱 값지니 그 친구도 힘내기를 바란다. 뉴욕 메츠 파이팅! 시카고 컵스 파이팅! 기아 타이거즈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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