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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랑 Dec 31. 2023

겨울 뒤엔 봄


 잠을 이루지 못하던 새벽, 심장이 바닥까지 쿵 떨어졌다. 한 아이돌 가수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짧은 동영상으로 그의 춤추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싱그러운 에너지가 보는 사람도 기분 좋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는 모습만 보여줬었는데, 그의 속은 많이 곪아가고 있었나 보다. 때아닌 재능 많은 청년의 비보에 가슴 한구석이 먹먹했다. 하지만 스스로 생명의 불꽃을 꺼버린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작년부터 명리학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모두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팔자’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운명을 읽을 때, 타고난 팔자 이외에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대운’이라는 것이다. 대운은 들었을 때의 어감처럼 대박 좋은 운이 아니라, 10년마다 변화하는 운이다. 이는 계절의 흐름과도 같다. 명리학 자체가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사계절처럼 운은 우리 곁에 머물렀다가 떠난다. 내 대운은 봄-여름-가을-겨울처럼 순행하지 않고 가을-여름-봄-겨울로 역행한다. 그러니까 나의 어린 시절은 늦가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대운이 겨울을 막 지나 아직 칼바람이 불던 늦가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께 상담실로 불려 갔던 적이 있다. 학교에서 한 심리 검사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문항에 체크했기 때문이다. 학년 전체에서 그 문항에 체크를 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므로, 다른 친구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놀랐다. 당시에는 병명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소아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 그때는 행복감을 잘 느끼지 못했다. 물론, 아주 간혹 그런 감정이 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 따위가 행복감에 젖어도 되는 것인지 의심했다. 행복이라는 감정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운이 한가을이 되었을 무렵이다. 18살 여름, 드디어 죽기로 결심했다. 바들바들 떨며 난간에서 일어섰다. 이제 뛰어내리기만 하면 되었다. 위태롭게 서서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심장을 꿰뚫을 듯 나를 향해 뻗은 창과 같은 나뭇가지들과 매점을 다녀오는 학생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어울리지 않게 어우러졌다. 불현듯 무서워졌다. 이 육신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질 것이라 생각하니. 난간에서 내려와 세상을 잃은 것처럼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쩌면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잘 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것을.


 지금은 어느새 뜨거운 여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죽기로 결심했던 나이의 두 배만큼 살아냈다. 상황은 많이 변했다. 늘 외톨이였던 그때와 다르게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많고, 불러주는 곳도 많다. 사소한 것에서도 쉬이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내 모습은 스스로도 낯설 정도다. 열여덟에 목숨을 끊어버렸더라면, 이런 모습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힘들었던 날들도 훈장처럼 남기고 간 것들이 있다. 그 시절이 나에게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도록 독립심을 주었으며, 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겁이 많아서 죽지 못한 입장에서 알고 있다. 자살이 얼마나 많은 용기를 요하는 것인지를. 그리고 죽으려는 용기로 살라는 말은 전혀 위로가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피지도 못하고 아스러진 꽃망울과 같은 이들을 떠올려본다. 살아낸 자의 이기심으로, 살아낼 용기를 잃은 이들이 조금 더 견뎌내어 주기를 바란다. 지금은 비록 잔혹한 칼바람이 매섭게 부는 계절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간도 언젠가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아름답게 피어나게 해 줄 따스한 봄이 올 것이다.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어 녹이며 눈물짓는 당신이 꼭 봄 햇살을 만끽하여 보기를, 살아내길 정말 잘했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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