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행의 조각들을 모으며.
2016년 2월 28일.
남편과 내가 지구 반바퀴 세계여행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날짜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복귀한지 곧 만으로 4년차가 된다.
제법 긴 시간이 지났지만 여행을 떠나던날 나보다 더 큰 배방을 짊어지고 공항버스를 타러 도착했던 터미널의 새벽녘 공기 그리고 몇 개월 떠나 있었다고 다소 이국적으로 느껴지던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의 복잡 미묘한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짧은 시간 동안 하도 많은 도시를 분주히 돌아 다니느라 희미한 기억으로만 새겨진 여행지도 꽤 많은데 이상하게도 저 두 순간 만큼은 바로 어제의 일인냥 아주 뚜렷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여행의 시작과 끝이기에 아주 강렬한 무언가가 남았나보다.
정말 오랜만에 브런치에 작성해두었던 여행 초반의 글을 다시 읽었다.
https://brunch.co.kr/@kjyoung77/2
이 글을 쓸때만 해도 계속해서 여행기를 이곳에 남겨야지란 굳은 결심을 했는데... 결국 출사표스런 글 하나가 6개월간 남긴 유일한 흔적이 됐다. 준비없이 나간만큼 하루살이처럼 매일매일 다음 경로와 내일의 숙소, 그리고 다음 끼니를 먹을 곳을 찾아 헤매느라 정신이 없었다. 설상가상 중간에 폰과 노트북도 모두 도난당해 사진도 많이 날렸고 무언가를 써내려갈 의지도 함께 잃었다.
가진돈 탈탈 탈어서 진짜 여행에 올인해도 괜찮을까?
여행도 별로 안해봤고.. 영어도 짧은데...
긴 시간동안 배낭여행을 잘 해낼 수 있을까?
다녀오면 우리는 뭐 먹고 살아?
우리를 다시 받아줄 곳이 있을까?
이 여행 때문에 남들보다 삶이 뒤쳐지지는 않을까?
돌아와서는 위의 고민들이 날카롭게 우리를 괴롭혔다. 사실 여행을 떠났던 걸 후회한 적도 많았다. 고작 6개월의 시간이었지만 한창 사회생활을 해야하는 우리에게 그 공백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다. 여행 이후에는 새로운 삶이 시작될거라는 작지만 큰 기대도 무참히 깨졌다. 그런 달콤한 기회는 전혀 찾아오지 않았다.
특히 그리 많지 않은 돈을 탈탈 털어 갔기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경제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우리를 짓눌렀다. 다행히 지인의 소개를 받아 내가 먼저 재취업을 했다. 다녀온지 일주일이 조금 지나자마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한달 후에는 다시금 평범한 직장인이 됐다. 결국 여행을 떠나기전 다니던 회사와 비슷한 광고쪽 일을 하는 곳이었다.
나는 6개월간의 여행 패턴을 다시 일상의 시계로 돌리면서 새로운 회사의 새로운 포지션에서 적응 하느라 허우적거렸고, 나보다 2개월쯤 취업이 늦어졌던 남편은 일자리에 대한 조바심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회사가 정해지고는 아무 계산없이 훌쩍 떠났던 여행 때문에 경력을 인정 받는데 손해를 보기도 했다. 나 또한 너무 성급하게 회사를 선택하다 보니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고 결국 일년을 못채우고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아기를 가졌다. 출산과 육아가 시작되면서 더욱더 정신없는 일상들을 보내게 됐다. 한 해 한 해 결혼 연수는 쌓여가지만 아직 우리 소유의 집도 없고, 커리어도 탄탄하지 못하고, 그리 많은 돈도 모으지 못했다는 생각이 가끔 나를 슬프게 한다. 물론 그것이 모두 여행의 탓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테지만... 그 공백이 크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무시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여행은 우리에게 기대했던 삶의 변화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 오히려 안정적인 삶을 만들어가는데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남편과 넋두리로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얼마를 더 모았을거란 소리도 자주한다. 하지만 만약 지금의 기억을 모두 갖고 시간을 돌려 여행을 결정했던 때로 되돌아간다면... 우리 부부는 어떤 선택을 하게될까...? 그래도 우리는 주저없이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나지 않을까 가능한 예전보다 더 긴 여정으로?
장기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때 누군가 우리에게 '꿈을 먹고사는 부부'라고 했다. 그 때의 꿈을 먹고사는 부부는 이제 '추억을 먹고사는 부부'가 되었다. 후회를 하기도 하지만 반면 남편과 함께 혹은 각자 여행의 추억을 깊게 그려보곤 한다. 구글 포토에 쌓여있는 사진들을 돌아보고 맥주 한잔 기울이며 캄보디아의 카우치서핑을, 이탈리아의 맛났던 음식을, 인도의 사기꾼들을, 노르웨이의 멋진 자연경관을, 독일에서 만났던 인연들을, 산토리니의 숙소를, 벨기에의 맥주를 안주삼아 추억 여행을 떠난다.
180일의 여정이 모두 반짝반짝 빛나지는 않았다.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적도 많았고, 남편과 자주 싸우기도 했다.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사건 사고들로 아찔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제법 긴 그 시간동안 남편과 함께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평생토록 가지지 못했을 추억의 조각들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반려자와 평생을 두고두고 사골 국물 우리듯 꺼내 볼 수 있는 추억이라면 기회비용을 고려해도 한 번쯤은 할 만한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라도 지나간 여행의 조각들을 싹싹 모아봐야겠다. 더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행복했던 그 때의 기분을 더 자주 떠올릴 수 있도록 말이다.
2016년 2월 27일 랑카위에서의 마지막 노을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