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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성 Dec 09. 2024

계엄(戒嚴)이라...

고된 하루였다. 그래서 맥주 한잔을 하고 막 잠이 들려는 찰나에 TV를 틀지 않을 수 없었다. TV보다는 핸드폰이 빠른 시대에 살기에 채널을 돌리는 시간을 못 참고 기사를 뒤적거리며 머리 한쪽으로는 옷장 구석 어딘가에 있을 전투복을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가족들의 안전과 내 앞에 벌어질 경험 해본 적 없는 장면들을 산발적으로 떠올렸다. 그리고 곧 TV와 핸드폰을 동시에 주시했다.     


힘이 빠졌다. 믿을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뒤로하고, 아이들에게 정확하지 않고, 정확해도 이상한 이 상황을 대충 둘러대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예상대로 세상은 난리였고 강하고 센 언어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동조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말을 배우면서부터 입과 머리와 가슴에 새겨진 “국기에 대한 맹세”이다. 세뇌라면 철저히 세뇌당했고, 설득이라 해도 완벽히 설득당했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걸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숭고하고 거룩한 희생을 통해 정립된 민주주의를 자랑스러워했으며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입지전적인 경제성장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그런데, 2024년 12월3일. 그것이 무너졌다. 보잘것없는 이유와 옹졸하기 짝이 없는 몇몇의 판단력으로 갖다 붙이기도 힘든 연관성을 들이대 버린 ‘계엄령’에 여태껏 세계지도에서 작지만 커 보였던 대한민국이 한없이 작아 보이게 시작했다.     


그동안 ‘다 이유가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조금 손해 보더라도 넘어갈 수 있었고, 힘든 굴곡을 넘을 때도 아주 작은 긍정적인 면 하나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보너스로 집안에서도 아내와의 사소한 다툼도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나로서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별의별 생각이 드는 거짓말 같은 상황을 뒤로하고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엎질러진 물을 담고 있다. 다시 담기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피눈물을 흘리며 알고 있지만 그렇게라도 다시 담아보려고 하고 있다.

또다른 어떤 이들은 새 컵에 새 물을 담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라며 이왕 담을 거 새 컵을 찾고, 보기 좋게 담아낼 새 물을 찾고 있다.

우리 같은 평범한 누군가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너무나도 급하기에 너무나도 황망하기에 무릎을 꿇고 손을 벌벌 떨며 그저 엎질러진 물을 담아내려 하고 있다.

그 손으로 어떡해서든 우리가 생각했던 그 대한민국을 다시 담아내려 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이다.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아이들은 지금이 시각에도 자라고 있다. 내가 그랬듯, 내 아이들도 적어도 성장하는 순간만큼은 정말 여기 대한민국에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해야 이 나라가 ‘미래’라는 것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 그랬다. 바보가 신념을 갖는 것이 제일 무서운 것이라고.

그런데 적어도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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