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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어릴 적 내 시간은 느렸다.

by 고르


어릴 때 나는

할머니 집을 참 좋아했다.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지만, 그릴 곳이 없었다.


하얀 여백이 보이기만 하면 빼곡히 낙서를

채워 넣었던 나에게 스케치북은 비쌌고,

공책이나 교과서에 낙서하면 선생님과

부모님께 혼이 났다.


그래서 할머니 집이 좋았다.


땔감으로 쌓아둔 이면지, 달력들이 한가득

쌓여있는 걸 보면 그게 보물 같았다.


내 몸보다 큰 달력 전지를 금세 채우고

그렇게 밤새 그리다 달력을 이불 삼아

잠든 적이 많았다.


한 달을 한 시간 만에 써버렸던

내 어린 시절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그때 그 달력 종이 위의 꿈이,

지금 나의 직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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