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나는 한동안 디지털화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컴퓨터로 작업을 하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정교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진짜가 아니다.’ 나 스스로 이상한 잣대를 들이대며 디지털을 외면했다.
돌이켜보면, 이런 생각을 했던 이유는 아마도 디자인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디지털 기술은 표현 수단을 바꿨을 뿐,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시대의 발전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도구는 다양해졌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다.
예를 들어, ‘사과’를 표현한다고 했을 때 누군가는 붓과 물감으로, 누군가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또 다른 이는 글로 묘사한다. 도구는 다를 수 있지만, 핵심은 아이디어를 어떻게 구체화하고, 그 의도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하느냐다.
지금 우리는 AI 기술의 가속화를 경험하고 있다. 표현 방식은 더욱 다양해지고,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이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디지털을 넘어 AI 자체를 거부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넘쳐나는 정보와 기술 속도에 피로감을 느끼며, 오히려 아날로그 감성이 트렌드로 부상하는 현상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중요한 것은 남들과 속도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속도로 나아가는 것이다.
도구와 시대가 바뀌어도, 내가 표현하고 싶은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본질을 지키면서,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속도로 성장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