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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May 03. 2023

폭식하는 채식주의자(1)

음식으로 정의하면, 나는 잡종이다. 파프리카가 되고 싶은 맘모스빵이다.      


먹는 걸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안다는데, 난 그럼 가공식품 덩어리, 슈퍼와 편의점의 과자코너, 분식집의 눌어붙은 철판, 플라스틱 갑과 비닐과 첨가제, 밀가루와 설탕일 것이다. 해부하면 아마 그런 것만 나올 테지. 카카오도 들어가지 않은 싸구려 초콜릿과 함께.      


우울증이 도지면 턱살이 붙는다. 온종일 안 먹다가 허기짐과 허무함이 토할 듯 올라오는 밤이 되면, 온갖 것을 입에 쑤셔 넣으니까. 마가레뜨, 치즈스틱빵, 사발면, 페스츄리, 쿠크다스, 떡볶이, 빵또와...... 먹고 있는 내게 실망해서 맥이 탁 풀릴 때까지, 이게 뭔 지랄이야, 짓씹으며 책상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쓸어서 쓰레기통에 처넣기 전까지. 


외로움, 공허함, 하루를 헛되이 날렸다는 초조함, 쓰레기처럼 인생을 살고 있다는 죄책감, 이번에도 기회를 분명히 망칠 거라는 자기 암시가 방안을 어둑히 집어삼키고 나를 짓누르면 ‘뭐라도 먹어야 한다’라는 주문이 뿅 튀어나온다. 손을 가슴에 얹고 가쁜 숨을 느끼며 수면바지를 입은 채로 맨발에 슬리퍼를 꿰어 신고 지갑만 들고 나선다. 주변엔 편의점뿐이다. 한 곳 있는 슈퍼는 편의점보다 비싸게 과자를 판다. 큰길로 나가면 파리바게뜨가 있다. 가능한 선택지에 ‘좋은 음식’이나 ‘건강한 음식’은 없다. 이렇게 십 년 사니까 몸에 가공품이 배어 버렸는지 떠오르는 것도 빈츠, 초코소라빵 따위다. 밤 열한 시, 새벽 세 시에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편의점을 향한다.


먹어봤자 나를 더 싫어하게 될 뿐임을 알지만, 돈만 버리는 짓인 게 자명하지만, 기꺼이 먹으라는 주문에 굴복한다. 나는 나를 싫어해서 먹고, 먹었다는 이유로 나를 더 싫어한다. 내가 삶을 사는 방식이 하찮아서 먹고, 먹는 행위가 너무나 보잘것없어 더 같잖아진다. 만 오천 원, 만 팔천 원을 편의점에서 긁는다. 이럴 거면 비싼 밥이나 먹지, 먹는 나를 타박하고 한심해한다. 먹는 내가 있고, 먹는 나를 혐오하는 내가 있고, 모든 광경을 공중에서 관찰하는 내가 있다. 나는 분열된다.      


나는 채식주의자다. 십삼 년째. 완전채식을 지향한다. 고기, 생선, 계란, 유제품을 먹지 않는다. 그러니까, 남들과 있을 때, 감정이 의지를 꺾지 않을 때, 공허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 때만. 

완전 채식을 지향하는 나는 감정적 폭식을 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척한다. 예외적으로, 어쩌다, 너무 외로워서, 월경 전이라서, 스트레스가 심해서, 배고파 죽겠는데 먹을만한 게 없어서, 납득할만한 이유로 먹었을 뿐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한다. 


나는, 내가 아니고 싶은 것의 합이다. 부정하고, 부정하고, 부정하고 싶은 인간이다. 이런 건 내가 아냐, 스트레스를 받아서 잠깐 그랬던 거야, 어쩔 수 없었잖아, 하고 잘라내고 싶은 그림자들. 묻어버리고 싶은 하이드 씨. 아, 전부 몰아낼 수만 있다면. 깨끗하게 청산하고 새 사람으로 살 수만 있다면. 


육신이 없다면, 오직 생각만 있다면 좋겠다. 그럼 갈등 따위도 없을 텐데. 추접스러운 욕망도 없을 텐데. 지긋지긋한 깁스, 감기, 몸살, 후두염, 비염, 장 꼬임, 악몽, 무기력, 불안, 우울이 없다면, 머릿속 이상을 착착 실현하는 삶이라면, 나도 오롯이 나를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채식은 시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덜 찝찝하게 행복하고 싶었다. 순도 100%로 행복하고 싶었다. 내 행복이 다른 존재의 고통 위에 기반을 두지 않길 바랐다. 그게 윤리적이라거나 건강하하다는 생각도 없었다. 가볍게 시작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십 년을 지나며 채식을 해야한다는 강박은 자기혐오로 죄책감으로 이어졌다. 


회식이나 모임에 나가서 국물음식을 먹을 때 멸치국물을 빼지 못해 해산물을 먹기도 했다. 냉장고 없는 기숙사에 사는 두 달동안은 전자레인지에 돌린 고구마와 사과로만 끼니를 때운적도 있다. 기본적으로 매끼와 간식을 직접 해먹거나, 남이 대신 해줄 수 있거나, 비싼 채식식당에서 밥을 사먹거나 야채김밥과 떡, 과일로 배를 채우는 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건강하고 맛있는 식사는 돈과 시간과 에너지가 있어야 가능했는데 모두 부족했다.  


자연히 자주 실패했다. 배고픔을 느낄 때, 먹을 게 없을 때, 우울할 때, 밥 해먹을 기력이 없을 때, 이천 원으로 편의점에서 저녁거리를 골라먹어야 할 때, 나는 자주 채식이 아닌 쪽을 선택했다. 맨날 먹는 맛대가리 없는 김밥이 지겨웠다. 눈치 보면서 부탁하기도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채식에 실패할 때마다 나는 나를 조금씩 더 싫어했다. '잘해야 돼, 똑바로 살아야 해, 이렇게 살면 안 돼, 이건 나쁜 짓이야, 이러지 마, 진짜 겨우 이렇게밖에 못 해? 난 쓰레기야. 개쓰레기.' 스스로에게 욕을 했다.


채식을 하지 못 할 때마다 내 안에서 나를 이루는 기둥이 타격을 받는 기분이었다. 기둥이 무너져 잔해가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기둥이 무너지면 형편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매번, 실패할때마다 나는 나를 쓰레기라고 했고,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고, 위선적이라고 타박했다. 내가 먹는 것, 나, 음식은 없고 강박적인 신념만 있었다. 채식을 하겠다는 이유로 나는 지금, 여기서, 느끼고, 먹고, 원하는 나를 지우고 ‘나여야 하는 것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먹기란 자고로 축복과 즐거움이지 않나? 그러나 내게 먹기는 검열과 두려움, 결핍, 죄책감이었다. 잘못할까 두려워 음식을 자제하다가, 배고픔이나 스트레스로 터져나와 당장 눈 앞에 있는 것을 주워먹고, 금새 후회하기를 반복했다. 돈 쓸 각오를 하고 채식식당에 가면 음식 두 개, 후식, 음료까지 시켜 먹었다. 다시는 못 온다는 마음에서였다. 늘 먹지 못하니 먹을 수 있을때는 푸드파이터처럼 먹었다. 그리고는 내 몸을 되돌리려고 하루이틀 굶었다. 그러나 억지로 참다보면 다시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그럼 곧 우울해졌다. 욕망 하나 제어하지 못하는 몸뚱이가 싫어서 부들부들 떨었다. 길거리를 걸으며 혼자 울었다.


폭식-절식은 결핍과 폭발의 사이클과 일치했다. 먹기와 먹지 않기는 우울, 공허, 욕망의 좌절과 결핍 속에 잠겨있었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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