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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May 03. 2023

폭식하는 채식주의자(3)

십 년의 감정적 폭식은 먹는 행위를 범죄로, 부끄러움으로 만들었다. 다른 존재를 착취하지 않은 윤리적 먹기를 지향하면서도 먹어선 안 될 것들을 먹는 자신을 발견할 때, 나는 죄악을 저지른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살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에게 폭언을 퍼붓는다. “넌 쓰레기야.”     


일 년에 걸친 상담 끝에 이상적인 모습을 정해두고 실제 나와 비교하면서 비난하는 일을 덜 하기로 결심했다. 채식은 딱 맞는 시도였다. 강박과 자기미움으로 변질됐다는 점, 매일매일 하는 선택이라는 점, 자주 저지르는 실패라는 점, 건강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나를 덜 미워하기> 프로젝트에 적합했다.


어떻게 할지 다시 찾아낼까지 채식을 멈추겠다고 여자친구에게 얘기했다. 약간의 불편함 정도는 감수할테고 채식을 하려고 최선을 다하겠지만,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한대도 스스로를 즉각 비난하는 대신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다고 했다. 높은 기준을 따르지 못하는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고,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그만 생각하고 싶었다. 한밤중에 빵을 먹고 종일 과자를 달고 살아도 ‘아, 지금 과자가 먹고 싶구나. 왜 그럴까? 배가 고픈가? 마음이 허한가? 그럴 수 있지. 왜 마음이 허할까. 외롭니?’하고 생각하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다고 했다. 제발 좀 그만 나를 미워하고 싶었다. 


최선을 다하지만 못 할 수도 있지, 하는 뻔뻔함을 갖고 싶었다. ‘될 대로 돼라’고 살고 싶었다. 탐식하면서 제가 뭘 저지르는지도 모르는 스테판 오블론스키*처럼 살고 싶었다. '좀 엉망으로 살면,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잖아? 비윤리적으로 살면, 뭐, 어, 가끔은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인간인데. 솔직히 내가 좀 비윤리적으로 살아도 남들에 비하면 그렇게 심하지도 않을 걸.'


나를 인간으로 대해주고 싶었다.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고, 욕망도 품고, 하면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인간으로. 백 년, 오십 년을 내다보면서 늘 올바른 판단만 하는 신처럼 굴라고 요구하는 대신.

    


채식을 그만두고 먹기와 음식과 관계로 새로 맺어보려고 노력한지 두달이 되어간다.


삶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을 때, 하루를 마음먹은 대로 끝내지 못할 때, 쌓여있는 과제를 회피하면서 불안해할 때, 생산성 있게 건강하게 살지 못하는 내가 싫을 때, 여전히 ‘뭘 먹어야 해!’하는 욕망이 치고 올라온다.


두 달 동안 안 먹은 척하는 기술이 늘었다. 같이 사는 여자친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온다. 쿠키 상자를 버리고 내용물만 먹고 온다. 가방에 호두과자를 넣어 지하철을 기다리며 먹는다. 여자친구가 출장을 가는 밤에 잔뜩 먹고 여자친구가 돌아오기 전에 쓰레기봉투를 버리고 두 시간씩 환기한다. 어차피 다 아는 눈치지만, 그래도 여자친구 앞에서는 그렇게까지 엉망이고 싶지 않다.


내 목표는 내가 싫어지는 밤에 안 먹기가 아니다. 그렇게 먹는 나를 덜 미워하기다. 나를 이해해 주다 보면, 언젠가는 나와 화해할 날도 오겠지. 열 번 미워할 거 여덟 번 미워하고, 두 번 뭐라고 할 거 한 번만 뭐라고 하다 보면 안 미워하는 날도 오겠지. 


혼자일 때의 내가 싫다. 제어하지 못하는 욕망이 싫다. 깨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습관이 싫다. 또 저지를까 무섭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 튀어나오는 게 싫다. 그것까지도 나겠지, 다잡아 보지만 그래도 싫다. 싫은데 어떡해? 


나를 불쌍해하기로 한다. 미워하는 대신 안쓰럽게 여기기로 한다. 타인을 대하듯 가엾이 여기기로 한다. 미움보단 동정이 낫지 않나. 나를 여엿비 여겨줘야지.      


내일 아침이 되면 깡그리 사라질 마음이라 해도.      

그럼 내일엔 또 내일의 마음을 먹어야지.     


매실차를 마저 마신다. 밤 열 시 오십 분, 타르트는 좀 그렇고, 사과나 한쪽 먹어야겠다.     

뭐 여자친구가 타르트를 남겼으면 좀 먹을 수도 있고. 놔두면 맛없잖나? 누군가는 먹어야 하니까!


*스테판 오블론스키는 안나 카레리나의 오빠다. 탐식과 불륜이라는 죄를 저지르지만 아주 행복하고 생각이 없는 문제적 인물로 작가 톨스토이가 그렸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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