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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May 03. 2023

폭식의 사이클

먹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다음엔 뭘 했겠는가? 간식을 잔뜩 사놓았다. 비건빵집에서 양파빵, 모카번, 초코 카스텔라, 딸기카스텔라, 쿠키, 단팥빵, 시나몬롤, 고구마롤, 흑미식빵, 단호박식빵을 사 왔다. 한 달 동안 먹어야지, 참을 수 없을 때 먹을 거야. 다짐하고 냉동실 아랫칸에 두 겹으로 싸매서 넣었다. 다 먹는 데 이 주가 안 걸렸다. 


그다음에는 다른 빵집에 갔다. 맛은 덜하고 더 비싸지만, 더 가까운 곳으로. 언제든 갈 수 있다면 한 번에 사오는 양도 줄테고, 조금씩 사오면 왕창 먹어봤자 많지 않겠지, 하는 계산이었다. 깜짝 놀랄만큼 시큼한 첫 맛에 이어 푹신푹신한 크림으로 혀를 감싸는 라즈베리케이크, 오미자즙보다 연하고 자두사탕보다는 진한 산딸기 케이크, 코가 절로 벌름거리는 마늘바게트를 들고 오느라 빵봉지가 찢어졌다. 하루 만에 다 먹었다.


쌓아두면 있는 대로 먹는다. 불변의 진리다. 이 사실을 깨닫고 하면 집에 쟁이지 않기를 택한다. 그러면 그때마다 사 먹고 버리기를 반복한다. 구제불능이다. 


다음엔 안 먹기 시작한다. 먹는 행위에 질려버린다. 입맛이 돌질 않는다. 그렇지만 몸이 있어서 배는 고프다. 계속 무시한다. 오후 네 시에서 다섯 시쯤이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뛰어나간다. 뭐라도 먹어야 한다. 이건 생존본능이다. 뇌에서 외친다. 먹어야 해! 세 젓가락쯤 먹고 허기가 가시면 후회가 먹구름처럼 몰려온다. 주변이 어두워지고 우르릉 쾅쾅, 나만 어둠 속에 잠겨있다. 왜 이러고 살아? 묻는다. 답할 수 있으면 이러고 살겠니? 받아친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나면 몸에 이물질이 쌓인 느낌이다. 조미료와 방부제, 설탕과 소금 좀 먹는다고 티가 나질 않을 텐데. 어쨌거나 느낀다. 다리가 부었다. 몸이 무겁다. 실제와는 상관없다. 느낀다. 몸에 독성물질이 쌓였고, 어서 빨리 빼내야 한다고 이렇게 계속 먹다간 빨리 죽겠다고 건강하게 살 때라고 외친다. 


그러면 이제 밥을 해 먹기 시작한다. 보통 저녁이 처음이다. 일과 중에는 굶거나 간식을 먹고 밤이 돼서야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로. 밥을 좀 해 먹어볼까?’ 한다. 그렇게 먹는 밥은 만족스럽다. 그렇겠지! 두어 달 만에 먹는 따끈따끈한 집밥이니까. 만족이 혀 끝에 남아 다음날에도 밥을 해 먹고 싶다. 성공할 때도 아닐 때도 있다. 그래도 느슨하게 사이클이 이어져서 적어도 리아미라클 버거를 사 먹는 대신 집에서 만두를 구워 먹는다. 도긴개긴이지만, 뭐 그래도 집에서 먹는 밥, 집밥이지 않나?


그렇게 한 달 정도 하면, 지친다. “아오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생산도 하고 재생산도 하냐? 나는 못 해. 못 해 먹겠다. 사먹을란다. 돈 벌어서 식비에 다 쓸란다.” 이 선언은 내뱉기 전에도 사실이다. 나는 정말로 생활비의 80%가량을 먹는 데 쓴다. 옷을 일 년에 세 벌쯤 사고, 약속은 한 달에 한두 번만 있고, 공과금은 여자친구 집에 얹혀살아 적게 낸다. 교통비, 휴대전화, 적금, 간혹 들어가서는 시외교통비(집에 갈 때), 경조사비(연에 2~3번), 강의비, 교육비, 운동강습비 빼고, 적어도 식비로 월 6~70만 원은 쓴다. 궁금한 점은, 그렇게 돈을 많이 들이면 맛있고 유기농에 때깔 좋고 비싼 걸 먹어야 하지 않나? 쿠크다스 여섯 개들이 2,400원, 초콜릿 한 개 3,800원, 왕뚜껑 1,500원이 합쳐져 60만 원이 되는 건 최악이다.


그렇게 돈을 물 쓰듯이 편의점에 바치다 보면, 맹세하는데 멤버십이 있다면 GS25, CU, 세븐일레븐 VIP가 오 년 전쯤에 됐을 거다, 다시 현타가 오고, 그러면 이제 다시 쟁이기 시작한다. 어차피 먹을 거 싸게 먹자. 인터넷에서 박스로 사면 개당 편의점에서 살 때보다 싸다.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어차피 먹을 거 비건으로 먹자. 적어도 죄책감은 안 느끼니까. 파리바게트에서 오천 원 쓰면서 돈도 버리고 몸도 버리고 기분도 버리느니 맛있는 비건 빵 사서 기분 좋게 먹자. 어차피 먹을 거니까 쟁여놓자. 


이런 식으로 합리화를 하며 20개들이 감자라면을 사면, 여자친구는 세 개쯤 먹고 나머지는 내가 다 먹는다. 처음 한두 달은 참는다. 사람이 양심이 있고 이성이 있지. 안 그런가? 꾹꾹 참아가며 일주일에 한 개씩, 쌀 씻을 힘조차 없을 때나 영 귀찮을 때, 맥주 한 캔과 함께 타락을 즐기고 싶을 때 먹는다. 먹고 나면 꼭 환기를 십 분씩 한다. 먹는 건 괜찮지만 냄새가 남는 건 싫다. 


그러다가 그 순간이 찾아온다. 숨만 쉬면서 소파에 붙어있는 때가. 침대 밖으로 나올 때는 물 마실 때와 화장실 갈 때뿐일 때가. 그것마저도 참고 참아서 갈 때가. 이 시기가 오면 참을 수 없는 배고픔을 당장 해소하기 위해 네 시반쯤 라면을 먹는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러면 짜잔, 어느덧 이 주 동안 라면을 먹고 있다. 많은 경우에는 그게 이주 내내 먹은 ‘끼니’의 전부다.(간식은 끼니로 안치니까. 맞지?) '와, 인생 이렇게 쓰레기처럼 살아도 돼? 안 될 것 같은데. 성인병이나 콜레스테롤 뭐 이런 거 걸리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을 중간중간 하면서, '오늘은 차라리 밖에서 밥을 사 먹자. 과자 사 먹는 거 다 더하면 밥값이다. 순두부를 먹든 비빔밥을 먹든 버스 타고 비건식당을 가든 무조건 나가서 사먹자!' 다섯 번쯤 다짐하지만 결국 저녁에 라면을 먹는다. 아, 인생. 왜 이따위일까? 


그렇게 한두 달쯤 먹고 나면, 음 이러다가 수명이 짧아지겠군, 혼잣말을 하고 있다. 좀 건강하게 살아볼까! 싶다. 몸이 아프고 기력이 없고 매일 배가 고픈 것도 제대로 먹지 않아서인 것 같다. 잘 먹으면 다 괜찮아질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다시 밥을 해 먹기 시작한다. 처음엔 쉬운 걸로 시작한다. 된장국, 된장찌개, 볶음밥, 두반장덮밥, 뜨끈한 밥을 입 속에 넣으면 훈기가 퍼진다. 갓 한 밥이 이렇게 맛있다니! 짱이다, 최고다! 매일매일 밥 해 먹어야지. 진짜 건강하게 살아야지. 난 이제 새로 태어날 거야. 진짜 제대로 살 거야! 세상이 아름답고 몸에 기운이 돈다.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외주를 잔뜩 받고 프로젝트를 벌인다. 책을 열다섯 권 빌려온다. 친구들과 약속을 잡는다. 


이주가 지나면 지치기 시작한다. 아, 내가 왜 이렇게 약속을 많이 잡았지? 그냥 집에 드러눕고 싶다. 왜 토요일도 약속을 잡고 일요일도 약속을 잡은 거야? 누가 이런 짓을 했어? 이 주 전으로 돌아가 내게 '카톡 멈춰! 못 한다고 해!' 소리치고 싶다. 그거 아냐,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아파서, 는 너무 자주 써먹은 변명이다. 또 취소하면 친구가 다시는 안 만나줄 것이다. 한숨을 폭폭 쉬면서 지하철을 탄다. 열다섯 권 빌려온 책 중에서 세 권을 읽고 나면 남은 책을 언제 다 읽을지 심란하다. 거실 탁자에 쌓여있는 책쪽으로 고개만 돌려도 목에 뭐가 턱 걸린다. 책을 서재 책장 안쪽 깊숙이 꽂아놓고 거실 소파에 누워서 휴대전화를 켠다. 마음이 좀 편하다. 


이주가 다시 지난다. 밥을 해 먹는 건 여자친구와 함께 먹을 때뿐이다. 라면을 끓여주기는 뭐하니까. 이 사람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양파를 볶는다. 아니 근데 왜 맨날 내가 요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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