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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동안 묻혀 있던 잔상

by 해달


지금도 코끝에는 하루 아침에 찾아온 찬 바람이 남아 있다. 추석 연휴 때만 해도 날이 왜 이렇게 덥냐며, 도로 여름이 왔다고 했는데 올 날씨는 참 이상하다. 중간이 없다. 오늘 아침에는 창문을 닫고 이불을 덮고 있어도 살짝 한기가 돌았다. 어느덧 찬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지난주에 운동하면서 들었던 말도 여전히 그렇다. “너무 참거나 견디지 말길 바라요.“라는 말도.


어제는 우연히 짧은 영상 한 편을 봤다. 어떤 여자분이 3년 동안 꾸준히 다니던 헬스장을 그만두게 된 계기였다. 트레이너가 권하는 대로 운동하고 식단도 조절하며 노력했는데 다릿살만 유난히 빠지질 않더란다. 그러던 어느 날 헬스장에 갔더니 트레이너가 왜 다릿살만 안 빠지냐고 화를 내더란다. 그 트레이너의 말하는 태도가 아니다 싶어 그만뒀다고 한다. 물론 릴스 하나로 모든 걸 판단할 수 없지만 그동안 다니던 헬스장을 그만두기까지 이 사람도 나름대로 고민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검도가 내 맘대로 된 적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이번엔 그동안 참은 게 속된 말로 ‘씨게’ 터진 것 같아 한바탕 앓았다. 이러라고 친정 검도관 관장님께서 본인의 죽도집을 주신 것도 아니고 신랑이 결혼 선물로 호구를 사 준 것도 아닌데, 생각만 해도 울컥해서 일부러라도 밖에 나가야 했다.


그러던 와중에 어제 오후에는 책을 읽다가 정말 갑자기 그 책이 생각났다. 6년 전에 읽었던 그 책. 주인공이 다도를 배우며 겪은 일을 쓴 책. 잔잔했지만 묵직했던 그 책, 일일시호일. 아, 뭐였더라? 바로 알라딘 창을 열어 검색하기 시작했다. 일일시호일, 일일시호일, 아, 뭐지…… 하며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하고 엔터키를 눌렀다.


매일 매일 좋은 날, 모리시타 노리코 지음.


이거다! 스크롤을 내려 출판사 책 소개를 읽었다. 대입도, 취업도, 연애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 속에서 20대 노리코가 다도를 배우며 깨닫게 된 것을 에세이로 담아낸 책으로, 책이 출간된 해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노리코의 다도 선생님이었던 다케다 역을 고 키키 키린이 맡았다고 한다. 계속 읽어보니 예전에 읽었던 그 책이 맞다. 처음 종이책으로 이 에세이를 읽었을 때도 일하면서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한창 받던 시기였다.


이 책이 6년 만에, 그것도 갑자기 떠오른 건 왜였을까. 한 번 읽은 책은 기본서를 포함해 꼭 봐야 하는 것 외에는 다시 잘 집어들지 않는 편이다. 전자책으로 다시 장만한 건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책이 거의 처음이지 싶다. 6년 만에 머릿속 저 어딘가에 깊게 묻혀 있던 잔상이 한순간에 떠오르다니. 이제 저녁에 잠깐 앞부분을 읽었는데, 그땐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이 와닿는 거였다. 이게 이런 얘기였나, 하면서. ‘다도’를 ‘검도’로 바꾸면 내 얘기였다. 스무살 노리코에게서 내가 보였다. 두 번째 스무살을 몇 년 앞둔 시점에서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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