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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벌어진 싸움

글감 : 수능

by 해달


싸움.


수능을 친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첫 수능 당시 고사장 안에서 벌어졌던 싸움만은 이맘때가 되면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감독관 선생님을 향해 발악하던 여자애, 그 여자애한테 “네가 뭔데!!!” 소리치다 분에 받쳐 엉엉 울던 여자애. 끔찍했다.


그날 모 여고 고사장. 1교시 언어 영역(지금의 국어 영역) 종료를 알리는 벨과 함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1교시 언어 영역 시험이 끝났습니다. 수험생 여러분께서는 답안지 작성을 멈추고, 손을 책상 아래로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다들 손을 무릎 위로 올려두기 시작했다. 간간이 한숨 소리가 들렸지만, 첫 수능이라는 긴장감이 그 소리마저 삼킨 것 같았다. 교탁에서 교실을 한 차례 둘러보신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답안지를 맨 뒤에서부터 걷겠다고 하시고, 교실 뒤쪽으로 걸어가서 차례대로 답안지를 회수하셨다.


몇 분 뒤, “선생님! 여기 아직도 답안지 작성해요!!“ 라고 정적을 뚫고 한 여자애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목소리에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순간에 그쪽으로 쏠렸다. 그 여자애는 손가락으로 근처 대각선에 앉은 여자애를 똑바로 가리키고 있었다. 정말 한 여자애가 분주하게 답안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마킹 실수로 중간에 답안지를 바꾼 것 같았다.


상황 파악을 마친 선생님께서 차분하게 그 학생에게 말씀하셨다. “학생, 마킹하던 거 멈추고 손 내리세요. 종 쳤어요.” 하지만 그 여자애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선생님, 조금만요. 조금만 더 하면 돼요.”

“안 돼요, 종 쳤어요. 이러면 시험 무효 처리돼요.”


결국 선생님께서 마킹 중인 여자애에게 다가가셨다. 처음에는 놀라서 가만히 있던 학생들도 선생님께서 어떻게 대처하실지, 소리친 그 여자애는 또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하며 소리 없이 눈을 굴렸다. 말로만 들었던 일이 하필 내가 시험 치는 교실에서 벌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각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다시 정적이 깨졌다.


“아, 안 걷어가고 뭐 하시냐고요!!!!!”


어우야, 또 깜짝 놀랐다. 뭐 하시냐고요!!!!! 이 마지막 말에 다른 애들도 놀란 것 같았다. 선생님한테 뭐 하시냐고요, 라니. 와, 보통 성깔이 아니다 싶었다. 아무리 인생이 걸린 시험이라지만 선생님께 저렇게 말해도 되나. 지금 생각하면 그 여자애의 말과 태도는 속된 말로 인성 ‘빻았다’는 표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학생, 이제 안 돼요. 걷어갑니다.”


선생님께서는 결국 뺏다시피 답안지를 갖고 가셨다. 멀리서 얼핏 보니 그 애가 미처 마킹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1교시는 얼음장으로 끝났고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우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나는 봤다. 답안지를 뺏긴 여자애가 고개를 파묻고 엉엉 울다 선생님께 소리쳤던 여자애에게 버럭 했다.


“야 , 네가 뭔데!!!”

“뭘 잘했다고 울어. 종 치면 멈춰야지, 뭐 하는 짓이야.”

“네가 뭔데!!!”

“이게 진짜, 남 인생 망칠 일 있나.”

“뭐???”


좀 잠잠해지나 싶더니 사달이 났다. 주변에서 보던 여자애들이 그만하라고 말려서 싸움은 멈췄던 걸로 기억한다. 이게 뭔 일이래. 반쯤 넋이 나가서 화장실에 다녀오고 그 뒤에 시험은 어떻게 봤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첫 수능 1교시부터 한 해가 지나 두 번째 수능을 치르고 대학 합격 발표 통지를 받는 날까지는 인생에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수능이 뭐라고. 수능이 뭐라고 고사장에서 싸움이 벌어지나. 돌이켜보면 그때 감독관 선생님도 참 난감하셨을 것 같다. 전 국민의 이목이 쏠리는 날이지, 교실 안 학생들은 잔뜩 예민해져 있지, 그 와중에 일이 터졌으니 얼마나 조마조마하셨을까. 그리고 그 여자애, 다시 생각해도 말하는 게 되바라져서 싹수없었다. 물론 종이 친 뒤에도 답안지를 계속 작성하던 그 친구도 잘한 건 아니지만 수능이 뭐길래, 성적이 뭐길래 그 앞에선 어른에게 무례한 것도 뭐라 하지 못하고 넘어가야 했던 걸까.


어쩌면 경쟁이 극심한 세상에서 어른들이 성적순으로 애들 줄 세우려고 만든 제도가 그려낸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화상이 교과 교사, 영어 원어민도 틀리는 이른바 킬러 문항에서 학벌 카르텔, 최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에서 일어난 AI 집단 커닝으로까지 이어지는 건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수능이 다가 아니’라는 말을 100퍼센트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어른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못 하겠다. 입시 제도로서 수능이 여전히 자리하고 심지어 일부 학군지에서 4/7세 의대 고시반이 있는 이 사회에서 ‘수능 성적이 다가 아니’라는 말을 차마 자신 있게 못하겠다. 대신 수능날 각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그동안 애썼다는 말을 하고 싶다. 시험이 어렵다고 가방을 싸서 도중에 고사장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수능 대신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는 거고, 거기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노력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과 인생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어제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덧붙임>

이호선 교수님의 <마흔의 기술>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문장이 있었다.


“나의 삶을 돌아보며 궤적을 그려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게 발생한 일에 매몰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부로 한 학생과 마지막 수업을 하게 됐다. 보통 중고등학생들의 사교육 수업 수강 기간이 평균 6개월인 점을 감안하면 그동안 정말 오래 수업했다. 결혼 뒤 올해 봄부터 사교육계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계속했었다. 미련은 없다. 이렇게 된 거 이제는 정말로 운전대 방향을 바꿔 다른 삶을 준비하는 데 집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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