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턱, 턱, 쿵, 쾅, 끼익- 철퍽, 끼익-철퍼덕, 툭툭, 툴툴툴.
뚜벅이임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운전을 세게 했다. 여기서 무거운 심정으로 고백한다. 최대한 적정 속도를 유지해 모범 시민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액셀을 밟은 구간도 있다는 것을. 특히 2장에서 종교와 신앙 얘기가 나올 때는 브레이크와 액셀, 중립 기어 사이에서 차를 어찌해야 할지, 다른 분들은 한 구절 한 구절 열심히 읽고 계실 텐데 난 왜 종교, 신앙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액셀을 밟고 싶은지. 이렇게 날 위험한 운전자로 만든 장본‘서‘는 바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다.
<사랑의 기술>은 예전에 고등학생이었을 때 독서토론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너무 힘들어서 애먹었던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난다. 기억에 남는 데엔 이유가 있는 법. 이번에도 결코 쉽지 않았다. 원문 내용 자체가 어려워서 번역도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도 직역투를 살짝만이라도 더 다듬어 주셨다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 한 끗 차이로 인문서와 독자 간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좁힐 수 있지 않을까. 겨우 다 읽었지만, 내가 이해한 선에서 가장 많이 고민한 문장 4개를 중심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을 듯하다.
1. “분리는 모든 불안의 원천”이라는 주장은 과연 유효한가?
1장에서 프롬이 언급한 키워드이다. 프롬은 ”분리는 모든 불안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분리와 불안은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 이론에서 제시한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어머니의 자궁에서 분리되고,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있을 때까지는 부모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안전과 생존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어딘가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어렸을 때는 가족, 사춘기 무렵부터는 또래 집단, 20대부터는 기관이나 직장 등에 속해 사회 구성원이 되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 프롬의 주장은 유효하다. 한편, 오늘날에는 어떨까? AI를 포함해 기술이 발달하면서 초연결 사회로 진입한 지금도 프롬의 주장이 100퍼센트 유효하다고 볼 수 있을까? 전자 기기로 24시간 타인과 연결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자발적 고립을 원하고 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연결’에서 오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분리’로 줄이고자 한다. 이렇게 시대, 사회적 맥락이 변한 상황에서 ‘분리가 모든 불안의 원천’이라는 주장이 과연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는 것이 있어야 오는 것이 있다’는 말과 비슷하다. 한창 책을 읽을 때는 이건 닭과 달걀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 묻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내리사랑’이라든가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는 말도 있다. 그런 경우가 있다. 자식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고 싶은데, 자기가 어렸을 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방법을 알고 싶다고 말하는 경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프롬은 주고받는 걸 활동과 참여하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3. 사랑은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사랑은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과도 연결된다. 특히 ’태도‘와 ’성격의 방향‘이라는 말은 사랑도 배워서 키워야 하는 역량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예비 부모 교육이나 적절한 감정 표현 교육이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거라고 본다. 여전히 경쟁이 극심하고, 입시 위주 교육이 굳건한 한국 사회에 정말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얼마 전 <MBC 스트레이트 시사 보도>에서 청소년들이 외모를 가꾸고 성적을 올리기 위해 다이어트, 심지어 ADHD 치료용 약까지 무분별 하게 구매, 복용하고 있다는 특집 기사를 봤다. 인터뷰에서 학생들은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해야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때문에 약을 먹는다고 얘기했다. 그때 든 생각은 ’부모가 정말 자기 자식이 그런 이유로 약까지 먹어가면서 성적 올리고 사회 생활 잘 하길 바랄까?‘였다. 이건 은연중에 부모를 포함한 어른들이 주입한 가치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과연 이게 맞는 건지 하는 생각과 함께.
4. 우리는 지식을 가르치지만, 인간의 발달에 가장 중요한 가르침, 곧 성숙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어질 수 있는 충분한 가르침을 상실하고 있다.
그저께가 된 11월 13일은 수능일이었다. 이맘때만 되면 첫 수능을 치르던 고사장에서 벌어졌던 싸움이 지금도 생각난다. “쟤 답안지 안 걷어가고 뭐 하시냐고요!!!” 하고 날카롭게 소리쳤던 그 여자애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수능이 뭐길래 어른에게 무례하게 대해도 다들 뭐라 하지 못하고 넘어가야 했던 걸까. 경쟁이 극심한 사회에서 성적순으로 줄세우기로 어른들이 만든 제도가 그려낸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그 자화상이 다들 틀리는 킬러 문항을 넘어 이제는 최근 대학가에서 일어난 AI 집단 커닝으로 이어지는 건 아닐지. 사회의 기준으로 ’나‘가 규정되는 현실에서 자신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과연 정상일까. 요즘에는 결혼한 뒤에도 부모에게 ’내 아이 왜 안 키워주냐‘며 자식이 서운해한다는 이 상황이 과연 정상일까.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는데 여전히 지식 전달 교육이 자리하는 이 상황이 과연 정상일까. 그저 각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어제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회,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돌보고 사랑할 수 있을지 가르칠 수 있는 사회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