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 : 리부트(reboot)
2주 전, 사과패드에 있는 자료 중 더 이상 쓰지 않고 있거나 앞으로 쓰지 않을 걸 추려서 삭제했다. 그동안 갖고 있으면서 네이버 박스에도 백업했던 자료까지 모두 비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두면 미련만 더 생기고 마음이 더 심란해질 것 같아서였다. 여태까지 고민한 게 허무할 정도로 ‘삭제’ 버튼 한 번에 파일이 금세 화면에서 사라져 휴지통으로 갔다. 시작한 김에 휴지통까지 비웠다. 마음이 홀가분하니 가벼워졌다.
기분 전환할 겸 일요일에는 미용실도 다녀왔다. 숏단발로 머리를 더 짧게 자르고 펌까지 하고 나니 진작 이렇게 할 걸 싶었다. 머리가 내 기준에선 생각 이상으로 예쁘게 나오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시원했다. 머리를 자르기 전에는 머리가 길수록 처지고 무거워져서 답답했다. 샤워하고 나서도 수건으로 툭툭 털듯이 닦고 말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다시 숏컷으로 돌아가는 건 엄두가 나지 않으니까 한동안은 이렇게 하고 지낼 듯하다.
도장에서 보내는 한 달도 또다시 지나간다. 요새는 허리와 오른쪽 다리 통증이 거의 없어서 다시 1주일에 3번 나갈까 생각할 정도로 기운이 (많이는 아니어도) 올라왔다. 다음 달 초에는 여행, 말에는 가족 모임이 있어서 아직 생각 중이다. 친정 검도관에 다녔다면 이번 주말에 열릴 시합 연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벌써 2~3년 전이다. 참가 명단에 여자 관원 한 분 이름이 있는 걸 보니 그때 생각이 났다. 연말도 슬슬 다가오는데 새해가 오기 전에 친정 검도관에 다시 놀러 갈 수 있으려나. 내년에는 승단할 수 있었으면. 원치 않게 너무 오래 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
지난 주말에는 화실에서 원데이클래스로 해바라기를 그리고 왔다. 시간만 더 있었으면 가운데 꽃씨도 좀 더 살리고 바탕도 더 예쁘게 칠했을 텐데. 시간이 시간인지라 바쁘게 그렸다. 해바라기 하나를 다 그렸을 때는 단거리 달리기를 한 것처럼 진이 빠졌다. 그래도 오랜만에 손으로 2시간 만에 이만큼 그린 게 어디야. 2시간 안에 완성해야 했기에 붓을 잡은 손을 바삐 움직이느라 잡생각 할 틈도 없었다. 화실을 나와선 근처 카페에서 쑥 라떼를 사서 마시면서 집에 걸어왔다. 마을버스를 타기 아쉬울 정도로 하천의 늦가을 풍경이 참 좋았다. 신랑이 화실에 다니고 싶냐고 물어봤을 때 마음 같아선 바로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사과패드로 그릴 때와는 달리 손으로 그릴 때만 느낄 수 있는 몰입감이 붓에 있다.
이제는 안다. 무기력이 찾아왔을 때는 인정해야 한단 걸. 나, 지금 무기력하구나, 하고. 그래야 조금이나마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지금 상태에서 변화를 조금이라도 주면 낫지 않을까 싶어 유튜브와 블로그에서 영어 공부하는 방법도 찾아봤다. 그러다 원서와 번역본을 같이 보며 번역 연습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그리고 한국어 책 꾸준히 읽기. 특별히 새로운 건 아니지만, 일단 시작하면 꾸준함이 관건이란 걸 다시 상기했다.
그제만 해도 비가 그치면 곧 겨울이라고 했는데, 아까 잠깐 밖에 나갔을 때는 아직 늦가을 기운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곧 겨울은 올 거고 그래서인지 지금은 뭘 해도 티가 잘 나지 않는다. 지금 당장 금융치료로 해결되는 일들이 아니라서 더 그런 듯하다. 아침마다 하는 필사도, 지난주부터 혼자서 시작한 헤드라인 5개 번역하기도, 책 읽기도, 글쓰기도, 그림 그리기도 당장 돈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계획대로라면 내년부터는 전자책 번역도 시작해야 하는데 이래도 괜찮을까 싶으면서 울렁거릴 때도 있다. 내년엔 올해보다 직역투 줄이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할까. 무튼 뭐든 올해보다 나아졌으면 좋겠다. 성과도 있으면 더 좋겠지만 너무 멀리 바라보면 힘들어지니까 작은 것부터 나아지길 바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