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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일상이 과거가 될 때

글감 : 연말을 기다리며

by 해달


프로크리에이트, 과슈로 채색. 핀터레스트 참고.


“나는 차갑게 식어 가는 마음으로 나의 세계,
나의 사랑스럽고 행복한 삶이 과거가 되어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하루 필사 헤르만 헤세 <데미안> 편


이사, 혼인 신고, 브런치 작가 신청 및 합격, 진로 변경,

브런치북 1권, 슬로 조깅 시작, <맡겨진 소녀> 번역 챌린지 완료, 서평 쓰기, 출판번역 수업,

마지막 본업.


글감을 확인하고 올 초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돌아본다. 몇 달 전만 해도 왜 이렇게 덥냐고 투덜댔는데 이제는 밖에 나갈 때 후드를 입고 목도리를 둘러야 하는 날씨가 됐다. 키워드를 뽑아 보니 그동안 아예 뭘 안 한 건 아니었구나 싶다.


이번 주 일요일이 이번 달 마지막 날이고, 그 다음날부턴 바로 12월이다. 12월에는 여행과 결혼 1주년 기념사진 촬영, 가족 모임이 있다. 이 일정만으로도 벌써 12월 달력이 차기 시작한다. 마음 같아선 친정 검도관에도 간식 들고 놀러 가고픈데 여건이 될지 모르겠다. 작년과는 달리 결혼하고선 친정과 시댁 경조사를 같이 챙겨야 하고, 이것도 생각보다 시간과 체력이 들어가는 일이란 걸 알았다. 언젠가 두 번째 브런치북을 쓰게 되면 (친정 검도관) 관장님께 질문해야 할 일도 생길 거 같은데…… (이럴 때 조심해야 할 건 의욕이 넘쳐서 초반에 달리다 번아웃이 오는 거다.)


아직 12월 한 달이 남은 시점에서 돌아보는 올해는 아쉽다기보다는 다소 정신이 없었고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에는 혼란스럽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익숙했던 일상을 과거로 보내면서 진통을 겪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하나가 아닌 둘이 같은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폭 늘었고, 이사 오면서 검도관도 다른 데로 옮겨야 했고, 결혼 후 그동안 해 오던 일의 한계가 현실로 와닿기 시작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적도 있다. 신랑은 결혼하고서도 그대로 지금 직장에 다니면서 더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것 같은데, 나는 이제 일에서 막 자리 잡기 시작했을 시점에 결혼하고 이사 온 거라 아, 결혼하면 여자가 변화를 더 많이 겪는단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물론 남자도 결혼을 기점으로 가장, 부양자와 같은 타이틀을 달면서 어깨가 더 무거워진단 걸 안다.


그래도 지금까지 신랑과 이 시간을 무사히 지나왔다. 밥솥으로 밥을 할 때도 중간에 한 번 김이 퐈아아아, 뿜어 나오듯 거의 매일 글을 쓰던 시간도 한몫했다. 글을 쓰지 않았으면 이미 압력 밥솥이 폭발해서 밥알이 전쟁터 속 총알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벽에 덕지덕지 붙었을 거고, 교복을 입고 생각했던 업을 어딘가에 또 묵히며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냈을 거고, 글과 책으로 관심사가 비슷하고 말 통하는 사람들도 단톡방에서 만나지 못했을 거다. 그런 면에선 혼자서 수험생 시절을 거칠 때 극심하게 느꼈던 불안이 오히려 결혼하고서 좀 잦아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데미안>에 나와 있다는 문구를 이렇게 바꿔본다.



“나는 모닥불이 타는 벽난로 속에 장작을 넣는 마음으로 나의 세계,
나의 사랑스럽고 행복한 삶이 지금이 되어
내 앞에서 타닥타닥, 따뜻하게 타는 모습을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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