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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ibi May 08. 2020

납작한 여행 말고

1년 된 여행 일기의 레이어 되살리기

작년 이맘때의 나는 무척이나 들떠있었다.

곧 두 달간의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으니까.


스물셋, 디자인과 3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휴학을 했다. 반년 동안은 운 좋게 얻은 인턴 자리로 열심히 돈을 모았다. 그리고 나머지 반년 동안은 내 대학생활 최대 로망이었던 '여행'에 그동안 벌었던 돈을 전부 쏟아부었다. 두 달 반동안 유럽과 미국, 일본을 여행했다. 그리고 다시 치앙마이에서 동기들과 한 달 살기를 했다. 방콕과 푸켓도 여행했다. 보장된 행복의 나날이었다. 마냥 즐겁고 마냥 행복했다. 어떻게 하면 이 행복의 솜사탕을 천천히 녹여먹을 수 있을까 매일을 고민했다. 그러나 역시 달콤한 시간은 순식간에 녹아버리고, 1년간의 휴학을 마친 나는 복학했다.


사람이 바쁘고 정신없고 힘들면 조금씩은 마음이 꼬이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복학 후의 나는 꼬여도 너무 꼬여버려서, 인스타그램 속 여행지에서 행복한 나에게 심통이 났다. 과제를 하다가 잘 풀리지 않으면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그동안 올렸던 수십 장의 여행 사진을 후루룩 훑어보며 위로를... 얻기보다는 화가 났다. 야, 넌 어차피 곧 한 치 앞길 캄캄한 무능력 복학생인데 뭐가 그렇게 좋아서 환히 웃고 있냐. 생각 없이 돈 팡팡 쓰니까 행복하니..?  부럽다, 부러워 죽겠다!


고작 몇 달이 흘렀다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먼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때의 내가 무엇을 느꼈고 깨달았는지는 전부 잊어버렸다. '10분 줄 선 뒤 오백장 찍어서 한 장 건진 뒤 세 번의 보정 어플을 거친 (남의) 사진'을 보듯 '야, 인생 폼나게 사네. 부럽다.' 하고 질투하기 시작했다. 나의 여행이 결국 단면의 이미지로만 남은 것이다. 커다란 점만 남고, 그 점을 이어주던 수많은 선의 시간은 전부 날아갔다. 그날의 감촉, 공기, 냄새, 생각의 수많은 레이어들은 시간이 지나며 한 장의 잘 보정된 사진으로, 그것도 jpeg로 완전히 납작하게 눌려버렸다. 결국 여행의 주인인 나 조차도 한 번 힐끗 보고 ‘와 그 시절의 나 부럽다~’ 정도로만 넘겨버릴 가벼운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오늘 우연히 여행 때 썼던 일기를 다시 읽었다. 여행 다니며 꼭 지키려고 했던 것들 중 하나였다. 매일 일기 쓰기. 간단히 무엇을 했는지 정도만 쓰더라도 꼭 기록 남기기. 완전히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날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괜히 더 그리워지기만 할 것 같아서 잘 읽지 않았는데, 웬걸. 일기에 아직 몇 겹의 레이어가 살아있었다. 전부 잊어버렸던 여행의 감각이 남아있었다. 여행을 다니며 나는 오직 '행복'의 감정만을 느꼈던 게 아니었다. 실망도 있었고, 감동도 있었고, 분노도 있었다. 일기를 읽다 보니 그때의 감각들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맞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었지. 그래서 돌아오면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지. 그렇지만 전부 잊어버렸지.


그래서 여행의 기억들을 다시금 새롭게 엮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최선의 예쁨과 멋짐만 모은 한 장의 납작한 기억 말고, 그날의 다양한 감정과 풍경이 각각의 레이어를 이루는 풍부한 기억으로. 물론 벌써 1년이나 지난 추억을 온전한 원본만큼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섬세한 기억으로 되살려보고 싶다. 주인인 나조차 그 소중한 시간을 그저 인스타 인생샷 정도의 깊이로 기억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니. 아직 남아있는 몇 겹의 레이어에서 감상과 울림을 좀 더 끄집어내 보자. 납작한 여행 말고, 오동통 두께감이 살아있는 여행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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