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40분, 익숙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PICC관 관리를 위해 찾아온 가정간호사는 언제나처럼 밝고 씩씩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라는 말투에는 늘 활기가 배어 있었다. 친정엄마는 “선생님, 더워서 어떻게 다니세요?”라고 걱정 섞인 인사를 건넨다. 간호사는 웃으며 “차로 이동하니까 괜찮아요”라고 답한다. 간단한 인사말에도 마음이 오간다.
항암제가 바뀌고 나서부터 3개월 동안 간호사는 3일에 한 번, 혹은 1주일에 한 번씩 우리 집을 방문해 줬다. 피곤하고 속이 메슥거려 말조차 힘든 날에도, 그녀는 무거운 기운을 조심스레 걷어내듯 내 상태를 세심하게 살펴주었다. 항암을 맞고 돌아온 직후의 나는 늘 녹초였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백혈구 주사 맞고 나면 진통제 미리 챙겨 드세요."라고 조언했다. 아무것도 넘기지 못하는 날에는, 영양제를 신청해 보자고 권해 주기도 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따라 주저앉는다. 통증은 생각의 여백을 차지하고, 남는 건 두려움뿐이었다. 머릿속이 흐려질수록 어떤 대책도 떠오르지 않았고, 평소 들었던 정보조차 희미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간호사의 말 한마디, 조언 하나는 막막한 밤에 켜진 불빛처럼 느껴졌다.
가령 전혀 음식을 먹지 못할 때, 뉴케어를 마시라는 조언은 흔할 수 있다. 나 또한 항암 식에 대해 교육받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고통이 극심할 땐 그런 정보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럴 때 차분하게 다시 알려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그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항암제의 독성에 쓰러졌을 때도 그녀는 꼭 병원에 가야 한다며, “참고 있다가 더 큰일이 나요.”라고 걱정스레 당부해 주었다. 누군가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말들이지만, 그 말들이 나에겐 생명줄 같은 조언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 소소한 궁금증들. 이 약을 먹어도 괜찮을까? 상처가 이래도 괜찮은 걸까? 그런 질문들에 그녀는 언제나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바쁘고 힘들 법한데도 한 번도 짜증을 낸 적이 없었다. 말투 하나, 표정 하나에서 성의가 느껴졌다. 그런 모습을 보며 마음 깊이 감사함이 쌓였다. 고마움을 표현할 길이 마땅치 않아 늘 마음에만 담아 두었지만, 어느 날 문득 작은 선물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산책길에 잠시 들른 시원한 카페에서 커피 상품권을 샀다. 그녀에게 건넬 작은 감사의 표시였다. 최근 출간한 책 한 권에도 짧게나마 감사의 글을 적어 넣었다. 그 두 가지를 준비해 오늘 건넸다. 선물을 받으며 그녀는 놀란 듯 물었다. “왜 이런 걸 주셨어요?” 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플 때마다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큰 위로가 됐어요. 제 상태에 꼭 맞는 조언을 해주셔서 정말 힘이 많이 됐어요.”
정말 그랬다. 아파서 생각할 힘조차 없을 때, 누군가가 조용히 내 옆에서 맞춤한 말을 건넨다는 것은 단순한 안내를 넘어선 치유였다. 비슷한 상황에서도 어떤 환자는 간호사의 말을 반갑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 한마디, 태도 하나하나에 진심을 느꼈고, 그래서 더 깊은 감사를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감사 표현을 직접 해주신 분은 선생님이 처음이에요. 진짜 감동이에요.”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다음 주 항암을 하며 PICC관을 제거하게 된다는 소식을 전하자, 그녀는 “그럼 오늘이 마지막 방문이겠네요?” 하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나 역시 그 말에 마음이 울컥했다. 언제까지나 그녀를 계속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마치 친한 친구처럼 익숙한 얼굴이 되어버린 그녀와의 이 짧은 관계가 끝나려니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나는 수술을 다음 달 말에 앞두고 있다. 수술 후 다시 항암을 하게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종양내과 담당 의사 말로는, 본인이 체크한 선항암이 끝나면 대개 PICC를 제거한다고 했다. 29일 진료 때 다시 확인해볼 예정이다.
간호사가 집에 다녀간 그날,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문득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던 모습, 밝은 목소리, 그리고 내 컨디션을 먼저 살피던 손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성스럽고도 담담한 그녀의 일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의 집을 하나하나 방문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함께 감당한다는 것은 단순한 직업을 넘어선 사명이라 느껴졌다. 어떤 날은 기운이 없어 말 한마디 못했던 나였지만, 그런 날조차도 그녀는 한결같이 내 곁에 있어 주었다.
작은 선물이라며 전한 책과 커피 쿠폰이 그녀에게 기쁨이 되었기를 바란다. 어쩌면 그것은 단지 나의 작은 마음이었겠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감동한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앞으로도 많은 환자분들께 따뜻한 손길을 건네주시길 바랄게요."라고 전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이별은 언제나 아쉽다. 하지만 헤어짐을 소중히 여기는 일은 내 삶의 중요한 태도 중 하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진심을 나눈 이 관계 역시, 아름다운 마무리로 남기고 싶었다. 사람 사이에 따뜻한 말 한마디, 고마움 한 조각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바라볼 수 있는 지금 이 시각이 고맙다. 그 시간 속에 만난 그녀 같은 이들에게 감사를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녀가 걸어가는 가정간호사의 길은 전혀 쉽지 않지만, 분명 아름답고 값진 길이다. 누군가의 삶에 힘이 되는 일을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직업정신이 아닐까. 다시 한번 그녀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