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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연구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5부 지혜는 내면의 절제에서 나온다.

내면


157. 위대한 철학만이 사람의 기질을 꿰뚫어 파악한다.

사람들에게 속지 말라. 이것은 속임 중에 가장 최악이면서도 가장 흔하게 일어난다. 상품보다는 가격에 속는 편이 낫다. 여기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사람의 기질을 꿰뚫고 기분을 파악하는 일은 위대한 철학이다. 따라서 책처럼 사람도 깊이 연구해야 한다.


<가족복지론> 수업 시간이었다. 생명의 전화에서 45년을 봉사해 온 교수님은 다문화가정 강의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나를 보며 손짓하셨다.
“아픈 데는 좀 어때요?”


2주 동안 학교에 나오지 못했던 나를 걱정해 주시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수술과 회복이 필요했기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연락을 드렸던 상황을 교수님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셨다.


“건강이 제일 중요해요. 친정엄마와 함께 있어도 내가 건강해야 오래 함께할 수 있어요. 힘들면 조금 내려놓는 것도 방법이에요.”

그 말은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내 안에 스며들었다. 나는 웃으며 컨디션이 조금 나아졌다고 답했다.


어젯밤 11시 30분이 지나서야 친정엄마는 저녁을 드시지 않은 채 TV를 보고 계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친구가 집까지 태워다 주었지만 오랜만의 수업이라 그런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몸이 휘청이고 잠이 쏟아졌다. 멀미에, 무거운 몸에, 걷는 것조차 버거웠다.


침대에 쓰러지는 순간, 엄마가 “아직 저녁을 안 먹었다”고 말했던 것이 스쳤다. 나는 아들에게 할머니 식사 좀 챙겨드리라고 부탁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들으니, 엄마는 몇 번의 권유에도 “속이 안 좋다”며 내가 오면 먹겠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손자가 차려주는 밥상도 좋지만, 여전히 딸이 차려주는 밥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따라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게 남았다.


오늘 저녁 8시, 아들이 또 연락을 한다. “엄마, 언제 와? 할머니가 엄마 오면 저녁 드신대.”
토요일은 종일 수업이 있는 날. 그 말을 듣는 순간 피로가 더 깊게 내려앉는다. 집에 가면 또 침대에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삼중음성유방암 3기. 항암 한 번을 맞고 호중구 수치가 떨어져 치료가 연기되고 있는 몸. 이것저것 먹어 보지만 두 번이나 항암을 잇지 못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친정엄마가 바라는 만큼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멀쩡해 보이는 딸이 정말 멀쩡했으면 좋겠다. 새벽 1시에 들어와도 씩씩하게 엄마가 원하는 것을 다 해드릴 수 있는 딸이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날은 수업이 늦게 끝나도 건강한 얼굴로 “엄마, 밥 드셨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딸이고 싶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집에 오자마자 쓰러지는 약한 몸이다. 그 모습조차 보여드리기 싫을 때가 있다.


그래도 나는 안다.


밤늦게까지 나를 기다리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그 기다림 속에 담긴 애틋함을 언젠가 더 따뜻이 안아드릴 여유가 내게 오길 바란다.

요즘 나는 하루 종일 기다리는 엄마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못난 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딸을 의지하고 싶은 엄마, 그 동안 못했던 것을 하면서 행복한 날을 보내도 소중한 시간일 텐데.

걷지못하는 엄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엄마을 보는 것도 힘들때가 있다.

함께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생각하면 야속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렇게 아프고 지치는 시간 속에서도

나는 엄마와 더 깊어지고, 더 따뜻해지고, 더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병과 돌봄 사이에서 길을 잃을 때가 있어도, 우리는 늘 서로를 향해 돌아갈 것이다.

나는 지치지 않는 딸이 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이 시간을 지나 강해진 내가 엄마에게 말하고 싶다.

“엄마, 나 잘 버텼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 때문에 버텨줘서 고마워요.”

어제, 오늘은 지쳐있어도,

내일은 그 말이 희망이 되어, 엄마의 가슴에 닿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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