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5부 지혜는 내면의 절제에서 나온다.
내면
160. 말하기 전에는 늘 시간이 있지만, 말하고 나면 되돌릴 시간이 없다.
말하기 전에는 시간이 있지만, 말하고 나면 되돌릴 시간이 없다.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화살이 되어 상대에게 꽂히고, 때로는 나에게 되돌아와 깊은 후회를 남긴다. 그래서 말할 때는 늘 조심해야 한다. 사소한 대화일지라도 마지막 말처럼 신중해야 한다. 말이 줄면 싸움도 줄고, 싸움이 줄면 마음의 상처도 줄어든다. 깊이 간직한 비밀에는 빛이 서리고, 경솔하게 말하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의 말에 걸려 넘어진다. 말은 그만큼 무겁고, 사람 사이의 거리를 한순간에 좁히기도, 멀어지게도 한다.
내 주변에는 말을 유난히 많이 하는 사람이 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도, 둘만 있는 자리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개인적인 생각, 타인의 이야기, 지나간 과거, 현재의 불만, 앞으로의 걱정까지 숨 돌릴 틈 없이 쏟아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고의 흐름이 곧 말이 된다. 누구에게 어떻게 들릴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흘려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듣는 사람은 지친다. 말은 서로의 공간을 채우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녀의 말은 일방적으로 밀려오는 파도 같다. 처음에는 경청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무거워지고, 마음은 피로해진다. 누군가 참다 못해 한마디라도 하면 그것이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불러오고, 끝나지 않을 또 다른 말의 시작이 된다. 결국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며, 독백이지만 누군가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고역이 된다.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피곤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그녀가 안타깝기도 하다. 우울증을 오랫동안 치료해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는 더욱 그렇다. 그녀의 말은 때때로 불안과 상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다. 말이 많다는 것은 비어 있는 마음의 반대편에 있는 갈증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바라봐주길 바라는 목마름. 그녀를 보면서 그런 결핍이 느껴진다.
그녀는 시부모에게 무시받았고, 친정에서도 희생을 당연하게 요구받으며 살아왔다고 한다. 남편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고, 자식들과의 대화마저 오래전에 끊겼다고 했다. 고립된 관계 속에서 그녀의 자존감은 서서히 무너졌고, 그 빈자리를 말로 채우며 하루하루를 버텨왔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존감이 낮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강하다. 그래서 더 많이 말하고, 더 크게 말하고, 더 자주 말하는 것일지도. 그녀의 그런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슬프고, 또 한편으로는 불편하다.
내가 그녀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끔은 그런 고민도 했다. 그녀를 환자로 바라봐야 할지, 아니면 상담을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갈팡질팡했다. 내가 가진 사회복지사적 시선이 자동으로 작동할 때도 있었다. 혹시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 내가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까, 조심스레 생각해 보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녀의 삶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깊은 고정관념과 상처 속에서 굳어져 있고, 그 무게는 내가 감당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담처럼 접근하기에도, 친한 친구처럼 다가가기에도 그녀의 내면은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감정이 닿을 듯 닿지 않고, 대화는 내 쪽에서 한 발 내딛으면 그녀의 말들이 금세 파도처럼 덮쳐와 빈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관계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분명해진다. 결국 나는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그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녀의 마음은 말로 바다를 만들어 흘려보낼 뿐, 그 바다의 깊이를 누군가에게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녀의 말이 많음을, 상처로 얼룩진 마음을, 인정 욕구가 말로만 드러나는 방식까지 모두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에너지를 지키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다. 경계를 세우되 외면하지 않고, 거리를 두되 무너뜨리지 않으며, 이해하려고 노력하되 내 감정을 희생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가능한 최선이다.
말은 결국 사람을 비춘다. 어떤 사람은 말로 마음의 깊이를 드러내고, 어떤 사람은 말로 마음의 상처를 감춘다.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누군가의 말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는 그 말 뒤에 숨겨진 결핍이나 아픔을 떠올려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복잡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다. 말은 사람을 보여주고, 그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내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