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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 May 01. 2023

책 밖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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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부모님은 바쁘셨고, 일찍 나가 늦게 오셨다. 학교에서는 몇 안 되는 친구들과 어울리긴 했지만, 책과 좀 더 친했다. 처음에는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을 읽었는데, 나중엔 책을 읽기 위해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책에 몰입되는 경험은 어린 나에겐 소중한 것이었다. 자연스레 책에 집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책의 본질은 모르고 있었다. 책이란 결국 세상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사실. 중요한 것은 책 자체가 아니라 책이 말하는 내용에 있다. 그리고 책 안의 내용은 책 밖에서 온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2

최근 산업계의 뜨거운 감자는 당연히 인공지능 채팅로봇 'Chat GPT'의 등장이다. 일상적인 대화부터, 정보 검색, 자료 조사, 논문 작성, 레포트, 프로그래밍, 문예창작 등. 언어로 활동 가능한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 있어, 인간의 속도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물론 아직 미흡한 부분이 있겠다만, 'Chat GPT'가 완전해질 날은 그리 머지않아 보인다. 프로그래밍을 잘하는 사람보다 'Chat GPT'를 잘 다루는 사람이 시장에서 더욱 높은 경쟁력을 가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이데올로기를 맞이한다. 이성에 대한 인간의 예찬이 세계 대전을 야기했듯, 인공지능의 발전 역시 언젠가 그 윤리적 문제에 당면하게 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실, 지금도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당장에  'Chat GPT'를 이용한 창작물의 저작권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다. 대학에서도 이를 활용한 논문이나 레포트를 인정해 주는 것이 과연 합당한 지 한참 논쟁을 벌이고 있다.


물론, 필자는 기술의 발전에 회의적인 입장은 아니다. 헤겔이 말했듯, 인간의 집단 지성은 어찌 되었든 더 나은 방향을 향해 수렴해 간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실수와 과오를 반복하며 성장해 간다. 인공지능 산업분야 역시 언젠가 안정기를 맞이하고, 인간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리라 의심치 않는다.


과거의 사람들은 책을 읽었다. 현대인 역시 책을 읽긴 한다만, 아마 인터넷을 이용한 서칭과 미디어의 시청이 더욱 주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 중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도 어째서 그것을 보고 있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더군다나 'Chat GPT'의 발전으로, 독서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늘어나고 있다. 책과 미디어는 사색의 대체품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은 떠올리기 어렵다. 인간은 사고의 한계를 맞이했을 때, 책을 찾는다. 인터넷을 검색한다.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본다. 이들의 오락적인 기능 역시 이러한 이유에 포함되어 있다. 이른바, '남의 생각을 잠시 빌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주관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주관은 판단의 잣대다. 소신과 신념이다. 그러나 '무식한 자가 신념을 가지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는 말처럼, 소신은 고집이 되기도 한다. 특정 사상이나 철학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사고를 편협하게 만든다. 책을 편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본인의 주관과 타인의 객관 사이의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해야 한다. 양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중도(中道)다. 인간의 사고란 너무나 나약한 것이라서, 자칫 흑백 논리에 빠지기 십상이다.




3

"사상가, 철학자…. 다들 똑같은 얘기만 해. '나만 옳다, 나머지는 다들 멍청이다'  한 세기에는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해놓고, 다음 세기엔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 유행이 문제인 거야, 그게 다라구. 철학이라니… 올해엔 미니스커트가 유행이다가 내년엔 긴 치마가 유행인 거나 같지. 물론 처음 시작 때는 쓰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겠지. 그러나 2권, 3권을 낸 후엔 허영심을 충족시키려는 것뿐이야. 남들보다 튀어 보이고, 뭔가 달라 보이고. 남들을 내려다보려고"

《화씨 451》, 프랑수아 트뤼포, 1966.


'화씨 451'이라는 영화가 있다. 동명의 SF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바야흐로 책을 불태우는 시대다. 정부는 역사와 지식을 조작해 국민들을 조종한다. 이를 위해 이전의 역사와 인류의 비판적 사고가 담긴 책들을 모조리 불태우는 정책을 시행한다. 영화 속의 파이어맨, 즉 소방관은 불을 끄는 일이 아닌, 책에 불을 지르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 이러한 정부 정책에 반하는 반역자들은 책을 몰래 반입하여 각자의 머릿속에 심는다. 개개인이 하나의 도서관이 되는 것이다. 책 속의 철학과 예술은 인간을 고양시킨다.


어린 시절의 난, 책과 게임을 좋아했다.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우치(愚癡)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 속에 있는 시간만큼은, 세상에서 내가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허공에 붕 뜬 기분이다. 몰입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 진짜 세상은 책 밖에 있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가 책을 쓴다. 책을 많이 읽는다 해서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책은 작은 세상조차 바꾸지 못한다.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 책을 읽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째서 그것을 읽어야 하는지, 어째서 그것을 읽고 있는지, 한 번쯤은 의심해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 이유가 사소한 것이라도 괜찮다.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더더욱 좋다. 진짜 세상은 책 밖에 있다. 책 속의 이야기는 책 밖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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