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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 Apr 30. 2023

감정의 기질

1

나는 제법 우울한 사람이지만, 궁핍하고 절박한 그런 사람은 아니다. 학사의 고등 교육을 받고, 경제적으로 빈곤하지도 않으며, 물질 사회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며 살고 있다. 더군다나 우울하고 염세적인 나의 언어가, 희망차고 낙관적인 어떤 다른 것들보다 고상하다 생각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우울해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묻겠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우울은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기질적인 우울이다. 우울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어느 연유에서건 만성적인 우울을 경험한다. 나의 몸은 정상성의 범주에 속해 있을지라도, 그 속에서 보고 느끼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다. 내가 겪는 우울은 필연적이다. 짊어지고 갈 업(業)이다.




2

감정은 날씨와 같다는 말이 있다.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도 있다. 이유 없이 가벼운 날이 있는가 하면, 이유 없이 우울한 날도 있는 것이다. 날씨가 지나가듯 감정도 흘러간다. 그러나 어느 지역은 비가 많이 내려 늪이 되기도 하고, 어느 지역은 비 한 줌 오지 않아 사막이 되기도 한다. 애당초 얼음으로 뒤덮인 곳도 있다. 날씨는 지나가지만, 기후는 그렇지 않다.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타고난 기질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태생이 밝고 희망찬 사람이 있듯, 우울하고 기운 빠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고 자란 환경과는 별개의 문제다.


영국은 일 년 중 절반 가까운 날에 비가 내린다. 혹은 흐리다. 기후는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모습은 제각기다. 반팔을 입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코트를 입는 사람도 있다. 우산이나 우비를 쓰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저 비를 맞기도 한다. 기질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그 기질을 다루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다. 나는 비가 내리면 비를 맞는 편이다. 그저 지나가게 둔다.




3

비가 오는 날에는 기분도 함께 가라앉는다. 우울함이 짙어진다. 감정의 습도가 높아진다.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여유가 필요하다. 여유는 우울마저 청차로 만든다. 그 향을 곱씹게 만든다. 씁쓸하지만 풍미가 깊다. 창 밖의 풍경과 그곳에서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저 그렇게 가만히, 무위의 시간을 보낼 뿐이다. 마치 세상과 하나 된듯한 몰입을 경험한다. 그곳에는 경계가 없다. 있는 그대로의 온전함을 느낀다. 마음의 청정함. 산산수수의 감사함. 비가 지나간 다음은, 먼 산마저 뚜렷하게 보이는 법이다. 그저 흘러가도록 둔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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