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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 May 08. 2023

피동의 삶


1

학창 시절에는 기타를 쳤다. 물론 특출난 재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몰두해서 연습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이 기타에는 본질이 있다. 연주하는 것. 기타는 연주되기 위해 만들어진다. 의자나 연필, 노트북에도 각각 그 본질이 있다. 그러나 정작 그것들을 사유하는 인간에게는 어떠한 본질도, 목적도 주어지지 않는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다. 인간은 우선 존재하고, 그 뒤에 삶의 목적을 찾아 헤맨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이유다. 그래서 삶에는 어떠한 무게도 없다. 삶이 제아무리 찬란하거나 잔인하다 할지라도,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 찬란함과 잔임함마저도 무색해지는 것이다.




2

불교도이긴 하나, 사실 과학을 신봉하는 편이다. 스탠리 큐브릭, 아서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 내가 SF 장르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화론,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엔트로피의 법칙은 광활한 우주의 구성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주에 대해 떠올릴 때면 나라는 존재가, 인류라는 종(種)이 덧없게 느껴지곤 하는데, 그 느낌이 썩 마음에 든다. 그러나 과학은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해 해명하지는 못한다. 우주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설명하더라도, 인간이 어째서 존재하는지 설명하진 못한다. 내가 과학을 신봉하면서도 종교, 철학, 예술의 힘을 믿는 이유다. 과학에는 과학의 역할이, 철학에는 철학의 역할이 있다.


인간은 시한부다. 태어나는 순간, 사형선고를 받는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의 의미는 죽음으로부터 온다지만, 죽고 나면 그것엔 과연 무슨 의미가 남을까. 어째서 태어나 어째서 죽어야만 하는 걸까.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나타난 이방인이다. 이런 생각에 사로 잡힐 때면, 마치 아래로 푹 꺼지는 듯한 느낌을 경험한다. 삶의 바깥에 있다. 발 닦고 잠이나 자면 그만이겠지만, 어째서 난 그러지 못하는 걸까. 또다시 우울.




3

그래서 삶과 죽음은 빈틈없이 완벽하다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미 이대로 온전한 것이기에, 나의 작은 손바닥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다.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라 해서, 능동인 줄 알았지만 피동이었다 해서, 삶은 흘러 흘러 정해진 결말을 향해 갈 뿐이라 해서, 조금은 씁쓸해지는 마음이었다.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함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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