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아마 『쌍둥이별』(*최근에는 『마이 시스터스 키퍼』로 타이틀이 바뀌어서 발매되는 듯하다)로 유명한 작가인 조디 피콜트Jodi Picoult가 제니퍼 피니 보일랜Jennifer Finney Boylan과 공동 저서로 낸 책으로 2022년에 나온 조디 피콜트(조디 피코와 조디 피콜트가 병행되어 표기되는 듯하나 이하 '조디 피콜트'로 표기)의 최신작이다. 조디 피콜트는 현 영미문학계에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사회문제를 심오하게 다루고 있어 좋은 평가받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명성은 전해 들어 알고 있었지만 한국어판으로 나온 책도, 영어 원서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다. 무엇을 읽을까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우연한 기회로 『Mad Honey매드 허니』를 읽었고, 공동저서임에도 불구하고 명불허전임을 알게 되었다.
훌륭하다, 충격적이다, 너무 좋았다…… 어떤 수식어를 써야 내가 읽는 내내 느꼈던 그 짜릿함을 모두 표현할 수 있을까? 사회 문제에 대한 메시지가 꽤나 강한 작품이지만 미스터리 장르의 긴장감과 트릭을 충분히 갖추고 있으며, 입체적인 캐릭터 묘사와 중심 문제와 별도로 얽히는 디테일한 사회 양상들까지 생각할 부분이 상당히 많은, 그런데 이야기의 재미까지 놓치지 않는 작품이다.
아쉬운 부분을 말하자면 담고 있는 이야기의 줄기들이 상당히 많아 정보가 과도하다는 점이 될 수 있겠다. 중심 되는 이야기 외에 가지들이 꽤나 굵직하게 묘사되어 그 부분만 해도 다른 하나의 이야기가 충분히 될 수 있을 만큼 이야깃거리가 많고 생각할 부분이 많아 중심 이야기에 집중하기 조금 어려울 수 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핵심이 뚜렷해지긴 하지만 초중반까지는 다른 문제를 메인 플롯으로 착각하기 쉽다. 중반부에 큰 반전과 함께 갑자기 휘몰아치듯 이야기의 중심이 다른 곳으로 꺾인다.
나는 기본적으로 리뷰를 쓸 때 책 줄거리는 거의 배제하고 내가 책을 읽고 떠올린 감상을 주로 쓴다. 특히나 스포일러를 하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하는 편인데, 이 책에서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스포일러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이 책의 가치에 대해서 논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래부터는 가장 중요한 스포일러가 되는 내용에 대해 밝히고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 내용 발설 / 주요 스포일러 주의 *
『Pageboy페이지보이』를 읽고 나서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우연이었을까? 이런 우연을 인연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을까.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해도 분명히 느끼는 바가 있었겠지만, 『페이지보이』를 읽고 난 후라 훨씬 더 책의 주제에 집중하기가 수월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상당한 혼란을 느끼며 가치평가를 내리지 못해 쩔쩔맸을 것이다
살인사건 미스터리에서 혐오 관련 사회문제로 변모하는 이야기 줄기
『매드 허니』는 '어셔'가 여자친구인 '릴리'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피고와 원고 측 사이의 공방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셔'는 상당히 다정하고 성실한, 말 그대로 이상적이고 착실한 청년으로 보인다. 릴리의 사망 이후로 사소한 행실만으로도 평판에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약 3분의 1 가량까지는 진짜로 어셔가 좋은 청년인지 아닌지, 실제로 릴리를 살해했는지 아닌지 그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는 죽은 -살해당한 건지, 사고로 인한 죽음인지 불분명한- 릴리가 '트랜스젠더'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릴리는 어셔의 동네로 이사 온 지 그리 길지 않았고, 릴리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은 그 동네에서 릴리의 엄마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어셔가 얽힌 사건은 '데이트 폭력 살해'에서 '트랜스젠더 혐오 살인'으로 변모하고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사건의 진실보다는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
두 작가(조디 피콜트와 제니퍼 피니 보일랜)는 이야기를 단순히 진실이 무엇인가에 맞추지 않는다. 여타의 추리 소설은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한 스토리텔링이지만 『매드 허니』는 재판 과정을 주무대로 활용하여 우리 사회의 편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우리는 쉽게 재판장이 진실을 밝히는 곳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제 재판장에서는 진실이 중요하지 않다.책에서는 사람들이 그 정황을 어떻게 여기냐에 따라, 또한 검사 측과 변호사 측, 그리고 배심원단측에서 정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통해서 이와 같은 사건이 우리 사회적인 시각에서 어떻게 비추어지는가에 대해서 보여준다. 이를 통해 '젠더', '성정체성'이라는 하나의 개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현재를 생각하게 만든다.
from https://unsplash.com/photos/7J7x8HLXQKA
젠더정체성이 끼어들자 몰려오는 혼란
어떤 이에게는 이런 일이 빤하게 생각될 것이다. 책에서도 '당연히 그 사람의 성정체성을 숨긴 것은 문제가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릴리'일리가 없으니까 스스로를 온전히 어셔나 다른 인물에 이입하고 '릴리와 같은 인물'을 단순하게 대상화하고 타자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는 묻는다. 상대의 성별을 사랑하는 거냐고. 성정체성이나 성별이 내가 알 고 있던 것과 다르면 그 사람의 무엇이 바뀌는 것일까? 만약 '릴리'가 스스로의 '성별'을 밝히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면, 릴리의 성별은 대체 무엇인가? 대체 무엇이 그 성별을 만드는가? 실제로 책에서는 우리가 막연하게 선을 긋고 있는 성별은 숫자처럼 딱 나눠 떨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양한 예시로 조목조목 반박한다. (예를 들자면, 자궁이 없다면 여자가 아닌가? 자궁을 적출한 여성은 여자가 아닌가?)
우리가 직관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 당연하고 뻔하지 않다. 성별과 같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알고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일 수 있다
무엇이 우리를 만들까?
『매드 허니』의 중심 이야기는 젠더 문제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초반부는 우리를 형성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셔의 엄마인 올리비아는 남편에게 학대당한 경험이 있는 가정폭력 피해자이다. 어셔가 살인 혐의를 받은 후 이제껏 그저 한없이 다정하고 착실하게만 보였던 어셔가 어쩌면 아빠의 폭력적인 기질을 물려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떤다. 전반부는 이러한 올리비아의 시선을 통해 유전자와 환경이 인간을 형성하는데 얼마나 영향을 끼칠까 하는 고찰이 차지한다. 하지만 릴리의 성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우리를 이루는 한 가지 중심축, 젠더는 무엇으로 형성되는가에 대해 이야기로 넘어간다.
우리는 물려받은 유전자와 환경 각각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을까? 유전자는 얼마나 강할까?
단순히 염색체나 성기의 모양으로 나눠지는, 우리를 이루는 정체성의 한 축은 우리를 형성하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까?
이러한 문제는 하나의 이야기로 다루기엔 너무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여서 사실 생각할 점이 너무 많다는 것이 중심 이야기에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면이 없잖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방면으로 생각을 펼쳐갈 수 있어서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from https://unsplash.com/photos/D44kHt8Ex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화 같은 이야기
마지막까지도 어셔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없었던 건 아마 내가 뼛속까지 반전에 긴장을 늦추지 않는 미스터리 덕후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 차례 큰 전환이 일어난 이후로는 이야기는 그저 성정체성 문제를 중심으로 다룬다. 그리고 (대왕 스포가 되겠지만) 어셔는 내내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과연 어셔와 같은 상황에서 어셔처럼 행동할 수 있는 20대 남성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심각하게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작가들이 실제 트랜스젠더들에게 일어나는 잔혹한 일을 그대로 묘사하는 대신에 현실에는 있지 않을 법한 말도 안 되는 행복을 소설에서나마 릴리에게 안겨 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비록 사건으로 인해서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릴리지만, 그가 꿈꾸던 동화 속의 백마 탄 왕자님(어셔)을 만나 그와 함께 한 동안은 온전한 행복을 누렸다고 말이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들에게도 그렇게 평범한 행복이 (우리가 그들은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충분히 가능하기도 말이다.
릴리의 죽음이 사고인지 사건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그래도 책에서 명확하게 진실을 밝히므로 (혹시 안 밝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고 읽어도 될 것이다.
사실 『매드 허니』를 다 읽은 지는 꽤 지났지만 이 글을 쓰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워서 몇 번이나 포기하려고 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어마어마하게 큰 담론이기도 하고, 소설의 플롯 자체도 상당히 복잡한 편이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잘 정리되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이 글에 대한 확신은 전혀 없다. 혹여 혼란 그 자체인 이 글이 어떻게든 업로드되어 누군가 이 리뷰를 읽고 있다면 그래도 좋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업로드 버튼을 눌렀다고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영어 원서 난이도 관련 이야기
『매드 허니』라는 타이틀은 올리비아가 양봉을 하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양봉과 관련된 용어들이 다수 등장한다. 또한 재판장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인 만큼 법정 용어나 법의학 용어가 나오는 장면도 다수 있다. 알고 있는 단어지만 평소와 다르게 쓰이거나,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다수 있어 속도감 있게 읽기는 조금 어려울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읽은 책 중에 모르는 단어가 가장 많이 나왔던 책이었다. 특별히 문체가 특이해서 어렵다거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별로 없었으나, 양봉하는 장면에서 여러 움직임과 모르는 용어들이 혼용되면서 정확히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 확 와닿지 않았던 부분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범최, 추리, 미스터리류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그래도 한번 읽고 나면 다음 미스터리 소설이 훨씬 읽기 편해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