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만 잔뜩 키워놓고서"
선인장 소녀 라일은 오늘도 문턱을 넘어왔다.
가시로 뒤덮인 내 마음을 살짝 찌르며,
“안쪽에 물 한 방울쯤은 아직 남았지?”
귓속을 간질이는 속삭임이 잔물결처럼 가슴을 흔든다.
그 순간, 그 아이가 처음 찾아왔던 저녁이 떠올랐다.
“넌 나랑 좀 비슷한 데가 있어.”
입꼬리를 비틀며, 숨을 길게 내뱉았다.
쳇. 내가 왜? 세상에 꽃도 나무도 많은데 하필 선인장이라니. 선인장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삐죽하던 라일은 웃었다.
“아닌 척하긴. 남들 들어오지 말라고 가시만 기르잖아.”
난 웃고 있었다.
아니, 울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울음은 웃음으로 감추는 게 습관이 됐다.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었으니까.
눈물 위에 웃음을 얇게 덧칠하면 아무도 못 볼 거라 믿었는데, 라일은 알아차린 듯 고개를 갸웃했다.
“센 척 그만해.”
숨을 거칠게 내쉬며 라일을 노려봤다. 가슴 깊은 데서 오래 묵혀온 말이, 날카롭게 치고 올라왔다.
그래서 넌?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거야.
말끝이 공기 속에서 삐걱대자, 나는 등을 홱 돌렸다. 그러자 등 뒤에서 흐릿한 미소가 따라왔다.
“안아주고 싶어서… 아니, 안아주고 싶은데 네가 가시에 찔릴까 봐. 그러니까 미안해서 말을 거는 것뿐이야.”
그날 이후, 라일은 자주 나타났다. 창가에 앉아 발을 흔들거나,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내 곁에서 함께 웅얼거리며 되지도 않는 노래를 불러주거나.
그 아이는 늘 묻지 않아도 알았다.
내가 하루 종일 삼킨 말들, 말 끝에서 사라진 표정들, 밤마다 마음속에서 흘러나와 마른 땅에 스며들어버리는 것들.
우린 그렇게 가끔 웃었고, 가끔 울었다.
그 웃음과 울음이 내 몫인지, 아니면 그 아이 몫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아이들이 아빠 집으로 떠나자, 식탁 위 찬밥을 뒤적이다 젓갈 한 점을 올리고 맥주 캔을 땄다.
“일주일간 자유네? 바라던 삶, 맞지?” 라일이 킥 웃었다.
글쎄. 잘 모르겠다. 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하루가 왜 이렇게 막막한지.
맥주 거품을 훅 불어내다 말고, 혼잣말처럼 흘렸다.
“막연히 떠나버린 게 몇 번이더라…”
라일이 웃는다.
캔을 만지작거리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만화 속 캐릭터처럼 살고 싶어 옷소매를 가위로 잘라냈던 날.
“포카혼타스?” 라일의 눈이 반짝였다.
그때 가위로 내 옷소매 다 잘라버렸잖아. 그럼 나도 인디언이 될 수 있다 생각했나 봐.
라일은 한참 나를 보다가, 가만히 웃는다.
그때부터였구나, 내가 너한테 말을 걸기 시작한 게.
라일은 이상한 아이였다.
가시를 숨기지 않는 선인장처럼,
때론 잔인하리만치 날 찌르면서도 필요하다면 몸을 갈라 그 안의 물을 나눠주는 아이였다.
내가 혼자 남아 울고 있으면, 내 울음이 마르기도 전에 먼저 울어 주었다.
누군가 나를 다치게 하면,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가시를 곤두세워 덤벼들었다.
나보다 먼저 화내 주었고, 내가 웃으면 더 크게 웃어 주었고,
내가 슬퍼하면 두 배로 슬퍼해 주었다.
모두가 등을 돌리고 손가락질을 해도, 라일은 내 옆에 서 있었다.
그 가시 끝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나를 찌른 상처 안으로 스며드는 건 차갑지 않은 물이었다.
그게 라일의 방식이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끝까지 내 편이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