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한 번쯤

그르르릉, 생의 끝에서

by 선인장 소녀 라일

맥주가 바닥나자 나는 조심스레 라일의 팔을 만지려 했다.

가시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라일은 한 걸음 물러섰다.

“오지 마.”

피식 웃으며,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겁쟁이면서… 왜 떠나왔어?


이 질문은 오래전부터 목구멍 끝에 걸려 있었지만,

정작 마주 앉으면 쉽게 꺼낼 수 없었다.

혹시라도 대답이 내가 두려워하던 쪽일까 봐.


라일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죽기 전에 한 번쯤 짠물을 몸에 묻혀보고 싶었어. 그리고 뭐, 그렇게 큰일이야?”

잠시 숨을 멈췄다가, 나를 곁눈질하며 속삭였다.

“네가 따라올 거잖아.”


가슴이 묘하게 쿵 내려앉았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너도 수영 못하잖아.

“그래서 더 재미있지.” 라일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맞다. 나는 물에 뜨지 못한다.


순간, 공기가 묘하게 기울었다.

마치 함께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순간처럼, 무모하지만 낯설게 안심되는 기분.

떨어져도 괜찮을 것 같은 건, 네가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웃다가, 맥주 캔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어렸을 땐… 강에 빠졌던 적도 있어.

라일의 눈이 커졌다.

“진짜?”

응. 그때, 눈앞에 하얀 물고기 한 마리가 지나가더라. 내 앞을 천천히 헤엄치다가…

내가 깊은 물 밑으로 사라지는 순간, 차가운 손 같은 게 내 발목을 스쳤어. 그 다음, 누군가 날 확 끌어올렸지.

라일은 숨을 죽이고 한참 나를 본다.

“그게 기억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 아무도 믿어주진 않았지만.

라일은 조용히 웃는다.
“넌… 늘 이상했어?”

나는 맥주 캔을 툭 치며 웃는다.
응. 근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나였던 것 같아. 계속, 이상한 쪽으로만 걸어온 거.

라일이 고개를 갸웃한다.

“괜찮아. 나도 늘 이상했거든.”

나는 그 말에 피식 웃는다.




맥주 캔이 텅 비자 공기가 묘하게 무거워졌다.

죽음이란 게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내 말을 라일이 받았다.

“왜?”


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

죽음을 처음 ‘끝까지’ 지켜본 건, 그때였다.

그 사람은… 늘 남을 먼저 챙기던 사람이었다. 마지막까지 나한테 건넨 것도, 직접 프린트해 만든 슈퍼히어로 뱃지였다. 겁내지 말고, 강단 있게 살라는 뜻이었을 거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기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길을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 사람의 마지막 순간— 드르르릉.

‘래틀 사운드’… 방울뱀 꼬리처럼 마른 숨이 목구멍을 긁는 소리. 호흡의 결이 달라진다는 건, 몸이 이미 삶의 리듬을 버렸다는 뜻이었고, 그 소리가 끊기는 순간, 생도 끝났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제야 마음속 깊이 낯선 무게가 가라앉았다.


회의감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래도 나라도 끝까지 봐줘야 겠다는 이상하게 집요한 의무감이 따라왔다. 살아 있는 자로서, 떠나는 자를 ‘끝까지 본다’는 것.

그게 내 생에서 처음으로 자각한, 가장 인간적인 본능 같았다.


죽음은,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다는 것. 삶의 불꽃이 사라지는 순간이 생각보다 조용하고, 생각보다 가벼웠다는 것. 그 가벼움이 오히려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사람이 떠난 자리를 이렇게 쉽게 비워낼 수 있다면, 살아 있는 우리는 도대체 뭘 붙잡고 버티고 있는 걸까. 그의 영혼이 떠나던 순간, 사람들은 울고 있었지만

나는 그 울음이 떠나는 사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남겨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니라 ‘짐’을 보내는 기분이어서?

아무렇지 않게, 그러나 뼈에 박히도록 말했다.


라일은 한참 말없이 있다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였어? 그 사람들을 믿지 않게 된 게?”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마도 배신감이었을 거야. 산 사람은 살고, 죽은 사람은 죽고… 그 후론,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같이 웃고, 밥 먹고, 얘기하는 게 점점 숨이 막혀왔어.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가는 세상에 나만 뒤처져 있는 기분이랄까.


라일은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러다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근데 이상하지. 너, 그 얘길 이렇게 하면서도… 따뜻해.”


나는 잠시 라일을 바라보다가,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그저 웃었다. 둘 사이에 잠깐, 웃음도 한숨도 아닌 공기가 흘렀다. 라일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늘 궁지나 위험에 몰리면, 마치 낯선 우주 속을 유영하듯 모든 걸 잊어버리는… 그런 병에 걸린 것도, 우린 같은 거 같아.”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어쩌면 그건 병이 아니라, 살아남는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너도, 나도… 아직 그 우주 속에 헤엄치고 있지.


그 말을 삼키자, 창밖 어둠이 안으로 스며든다.

가슴 안쪽, 아주 작은 파동이 번진다.

몸이 풀리고, 무게가 사라지고, 위도 아래도 없어졌다.

네가 있고, 내가 있고,

아직 흘려보내지 못한 그 사람의 숨과 온기, 웃음과 상처, 그리고 말이 되지 않는 아픔들이 둥둥, 풀리지 못한 채 떠다닌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고, 놓아도 멀어지지 않는다. 그 기억들은 물속에서 터지는 기포처럼, 아무 소리 없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이곳에선 아무것도 가라앉지 않는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결론에 닿지 않아도 된다.

여기선, 현실이 우리를 찾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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