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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ke Apr 15. 2024

독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독성학(19)

때로 진실은 더 고통스럽다

    초겨울 눈 내리는 산속 마을은 유난히 춥다. 아궁이에 불을 넉넉히 지펴 방안은 따스하다. 낡은 흑백텔레비전에서 「성냥팔이 소녀」 마지막 회가 방송 중이다. 성냥을 팔지 못한 소녀는 성냥을 켰다. 따스함을 느끼며 돌아가신 할머니를 만나며 끝난다. 따스하게 할머니를 만났으니 행복한 결말이라기엔 왠지 모를 슬픔이 배어 나왔다. 따스한 방안과 대비되는 슬픔은 한동안 이어졌다. 그렇지만 그때는 왜 그런지 알지 못했다.

 성냥팔이 소녀가 돈만이 세상을 지배하던 산업혁명 시대에 성냥 공장에서 일하던 여공들이 성냥 제작에 사용된 백린에 중독되어 인악(phossy jaw)이 심해지면 퇴직금으로 성냥을 받고 쫓겨났다. 이런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단편소설이라는 사실을 독성학을 공부하며 알았다. 인 중독으로 뼈가 녹아내리고 치아가 빠져 얼굴이 흉측하게 변한 소녀공 들은 별다른 직업을 갖기도 어려웠다. 성냥은 이들이 그나마 생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리라. 이가 빠지고 턱이 무너지며, 섭생에 어려움을 겪게 되어 감염과 굶주림으로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감염 등의 이유로 체온이 상승하면 추위를 느낀다. 특히, 체온이 상승하는 중에는 더욱 그렇다. 교감신경이 흥분되어 말초 혈행이 줄고 땀이 나지 않는다. 시상하부에 체온 중추가 오동작하는 것이다. 반대로 체온이 떨어질 때도 뇌는 착각을 일으킨다. 체온이 내려가면 추위를 느껴야 할 것 같지만, 중심부의 체온이 내려가면 뇌는 따스하게 느낀다. 그리고 말초 혈행을 늘어 뇌의 혈행이 나빠지고 나른함과 환각이 찾아온다. 성냥팔이 소녀는 눈 내리는 추운 겨울 얼어 죽은 것이다. 성냥팔이 소녀가 따스함을 느끼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만난 것은 성냥팔이 소녀가 얼어 죽어가는 중이었다. 성냥팔이 소녀는 인 중독 상태에서 동사한 것이다. 진실은 때로 보이는 것보다 슬프고 고통스럽다.

    다리 아래에서 발견된 변사 건에서 약물이나 어떤 독성 물질도 나오지 않으며, 사건 개요에 늦게까지 같이 술을 먹은 사람이 있는데 알코올도 검출되지 않는다며 이상하다고 물어온다. 개요는 첩보이니 다 믿을 것도, 안 믿을 것도 없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하니, 변사자가 만성 알코올 중독은 아닌지, 변사 당일 밤 기온은 몇 도까지 내려갔는지, 변사자는 사망 당시 어떤 상태였는지 확인해 보고 부검의에게 동사 여부 확인해 보라고 말해준다. 이런 봄날에 무슨 동사냐는 어린 후배에게, 동사는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면 동사하는 거야, 자세한 건 나중에. 지금 당장 설명하기엔 긴 이야기이고 밀려오는 감정 털어내기도 바쁘다.

    더운 지방보다 추운 지방에서는 동사가 더 흔하다. 특히, 추위를 이기기 위해 알코올을 섭취하면, 모세혈관이 확장되고, 알코올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해 추위를 덜 느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체온 손실이 많아지고, 혈중 알코올이 소진되고 나면 체온 유지를 위해 포도당이 공급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제때 이루어지지 못하면 오히려 동사 가능성이 증가한다. 몽골에서 K-Forensic(한국 법과학)의 전파를 위한 KOICA(한국국제협력단) 사업을 통해 연수생들을 교육할 기회가 있었다. 화학 전공자들인 데다 통역을 거쳐야 하니 그러지 않아도 어려운 독성학에 대한 설명이 어렵다. 인체의 에너지 균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독성 물질들로 인해 이러한 과정들이 방해되어 죽음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강의를 마치고 날카로운 질문을 받았다. 몽골에는 동사가 많은데,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간에서 글리코겐 함량을 참고하며, 글리코겐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면 동사로 본다고 했다. 그러나, 어려 정황상 동사로 보이는데 글리코겐이 많이 남아 있는 예도 있어 판단이 어려운데, 동사에서도 글리코겐이 남아 있을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인체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체온 유지나 간단한 동작을 위한 에너지는 해당과정을 통해 얻는다. 체내에 알코올이 들어오면, 알코올 대사를 통해 에너지를 얻으므로, 간에서 글리코겐을 포도당을 전환이 억제된다. 혈액 중 알코올 농도가 떨어지면, 생체는 체온 유지를 위한 에너지를 얻는데 필요한 만큼의 글리코겐을 포도당으로 전환하거나, 위장관으로부터 흡수된 것을 사용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원을 알코올이나 포도당 등을 통해 얻지 못하면 동사할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체온을 유지할 만큼의 포도당이 혈액에 공급되지 못하면 동사할 수 있다.

    극단적인 예는 만성 알코올 중독에서 볼 수 있다. 알코올 중독 환자여서 간경화 등으로 실질세포가 감소한 상태라면, 체온 유지에 필요한 만큼의 포도당을 공급하기 어렵게 되어 같은 조건에서 동사 가능성은 증가한다. 만성 알코올 중독이 되면 신체에 필요한 에너지를 포도당이 아닌 알코올에 의존하도록 필요한 효소나 대사 과정이 바뀌어 있는 신체적 의존 상태로 필요한 만큼의 포도당을 공급하는데, 어려움이 가중된다. 굶주림이나 만성 알코올 중독은 간에 비축된 글리코겐이 적을 뿐만 아니라 위장관으로부터 당류를 공급량이 적어 훨씬 불리한 상태이다. 따라서, 동사 여부의 판단은 혈중알코올농도가 얼마나 낮아진 상태인지와 변사자의 건강 상태, 변사 당일의 기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며, 단순히 글리코겐의 양만으로 결정하면 다양한 상황을 모두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고 조언해 주었다. 이 어려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고개는 끄덕였고, 혈중알코올농도가 낮아진 상태일수록 동사 가능성을 더 크게 고려해야 하느냐 물어와 그렇다고 답해주었다.

    고도의 지방간과 간경변으로 간의 실질세포가 줄어들게 되면 알코올의 분포용적이 감소하여 같은 양의 음주에서도 건강한 사람보다 급격하게 혈중농도가 상승하여 쉽게 취기를 느낀다. 혈중의 알코올을 에너지원으로 쓰고 나면 급격히 에너지원이 고갈되어 기운이 없어지고 우울해지며 손을 떨기도 하고, 섬망이 나타나기도 하며 활력도 없어진다. 이런 상태를 신체적 의존성이라 부른다. 다리 아래 변사자는 만성 알코올 중독이었고 고도의 지방간이었으며, 변사 당일 최저 기온은 17℃였다고 했다. 알코올이 높은 상태였으면 체온 유지가 가능했을 것이니 동사 가능성은 오히려 낮았겠지만, 변사자는 혈액에 알코올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 동사 가능성이 크다.

    부검의가 동사로 판단했는지, 만성 알코올 중독과 지방간 등 지병으로 판단했는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일일이 확인하기에 서로 일이 너무나 많고, 동사라면 더 슬플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죽음이 안타깝지만, 지병보다 동사는 더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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