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증과 물증 사이
노크와 동시에 열린 문틈으로 법의관 선생님의 열정이 들어온다. 항상 예의 바르시고 유머를 잃지 않으셔서 노크하시고도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만 유독 일 앞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신다. 상기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어오는 부검의 손에는 사진이 한 장 들려 있다. 사진에는 운전석에 대시보드에 다리를 올리고 안전띠를 맨 상태의 망자가 있었다. 실종 보름여 만에 한 저수지의 차 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는 사고사가 아닐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아무리 체구가 작더라도 운전석에서 대시보드에 다리를 올리고 안전띠까지 한 상태로 있기는 어렵다. 더욱이 차량의 기어는 드라이브 상태에 있었다. 쉬는 자세도 운전하는 자세로도 부자연스럽다. 부검의는 빠른 약물 검사를 요청해 왔다. 사망한 지 오래되어 혈액을 채취할 수 없었다. 간 조직에서 졸피뎀과 독실아민이 검출되었다. 중독사 할 만큼은 아니지만 깊은 수면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수사는 급물살을 타며 여러 정보가 수집되었다. 망자의 아내는 보험설계사로 망자에 16개에 달하는 보험이 가입되어 있었다. 특히, 교통사고 사망에 집중적으로 보상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또한, 망자는 수개월 전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트럭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망자의 아내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는 이유였다. 트럭 운전자를 사주해 고의로 교통사고를 낸 것으로 보고 수사가 이루어졌다. 내연관계의 한 남자가 등장했으며, 간이 좋지 않던 망자의 건강을 위해 민들레즙을 갈아 주었다고 했다. 수사팀은 망자의 아내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았다. 약물의 흔적을 찾기 위해 집에서 사용하던 믹서기 의뢰를 요청했다. 약물과 함께 갈아 넣을 수 있어서였다. 믹서는 마치 새것처럼 너무나도 깨끗하게 닦여 있어 식물 조각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당연히 약물도 검출되지 않았다. 설령 닦지 않았어도 약물과 함께 갈지 않았다면 약물이 검출되지 않았겠지만, 너무나도 깨끗하게 닦여 있는 믹서는 심증을 강하게 만들었다.
정황으로 심증을 가지면 결과의 해석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하는 것이 감정인의 자세지만, 정황으로 가설을 세우고 입증해야 하는 것 또한 감정인의 역할이다. 위 내용물에서 졸피뎀, 독실아민과 함께 시토스테롤(Sitosterol, 식물성 콜레스테롤의 한 종류)이 검출되었다. 민들레에도 포함되어 있지만, 여러 식물이 가지고 있는 성분으로 민들레를 특정하기는 어려웠다. 위 내용물에서 식물 절편을 골라내 유전자 종 식별을 의뢰했다. 민들레가 확인되었다. 약물 대부분이 쓴맛이듯 졸피뎀과 독실아민도 쓴맛이 난다. 민들레는 약의 쓴맛을 가릴 수 있을 만큼 쓰다. 그러나 민들레즙을 마신 것이 민들레즙에 약물을 타서 마시게 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했다. 모든 증거는 약간씩 연결고리에 빈틈이 있었다. 수년이 지난 후 유력한 용의자였던 아내가 무죄를 받으며 이 사건은 영구미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 미제 사건을 전담하는 특별 수사팀이 꾸려졌다. 망자의 아내와 내연남으로부터 협박을 받던 트럭 운전자는 수사가 재개되자 심리적 압박을 받고, 사주를 받아 교통사고를 냈다고 자백해 망자의 아내는 살인 교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실형을 받았다. 그러나 끝내 망자에 대한 살인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다. 망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실체적 진실과 법리적 진실이 일치하도록 과학적 사실을 통해 조력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타살 가능성이 크지만 제대로 설명할 무언가를 찾아내지 못한 것은 아쉬움과 자책이 된다. 실체적 진실은 망자와 가해자만 알 뿐이지만, 더는 말할 수 없는 망자를 위해 더 할 것이 없음이 안타깝다. 모두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하리라는 다짐으로 이 안타까움을 덜어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