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과 신내림
세상에는 먹고 죽을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알려진 물질을 모두 분석적으로 접근해서 해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약물, 농약, 연구된 사망과 관련될 수 있는 천연물에 대해 기본 스크리닝을 진행하지만, 모든 물질에 대해 스크리닝 하기에는 시간, 인력, 장비 모두 부족하고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그래서 경험한 물질은 가능한 스크리닝법에 통합하고, 나머지는 관련 정보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고 검토한다. 60여 년 축적됐지만, 여전히 중독사가 처음인 물질이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화학적 분석과 달리 감정은 경험과 방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며, 화학적 분석은 시료에 대한 관찰, 물리 화학적 특성, 사건 개요, 법의학적 소견으로 설정한 가설을 증명하는 수단이다.
중독사와 관련된 감정은 사망자의 나이, 성별, 직업, 사건 개요, 수사 정보, 유류품 등을 확인하고, 의뢰된 생체시료의 관찰과 물리 화학적 성질의 파악에서부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수행하는 스크리닝을 수행하고, 부검 소견을 확인해 특이점이 없는지 확인한다. 혈액 중의 농도나 사후 경과시간에 따라 다르지만, 일산화탄소 중독이나 청산 중독의 혈액은 선홍색인 경우가 많다. 또한 위 내용물은 일반적으로 산성이지만, 음독물질에 따라 알칼리성을 띠거나 과도하게 산성을 보이는 경우는 음독 강알칼리나 강산이 포함된 물질의 음독을 염두에 둔다. 많은 양의 청산염이나 세제 등을 음독하였으면 알칼리성을 띠게 되고, 이로 인한 출혈을 보이기도 한다. 음독물질에 따라 위 내용물의 색상, 점 그러나, 때때로, 부검 소견에서 특별한 사인이 없는 경우, 특히, 유서까지 있는데 중독원인 물질이 찾아지지 않으면 감정인은 난감하다. 언젠가부터 이런 상황을 민원이 발생했다는 은어를 사용한다. 민원은 때때로 그간 아주 드물게 발생했던 중독사 물질인지 검토하고, 사건 관련 정보를 추가로 입수하며, 위 내용물의 pH, 거품은 나는지, 색상은 어떠한지, pH를 바꿀 때 어떤 변화가 있는지, 냄새는 어떠한지 등을 좀 더 자세히 살피며 특이점이 없는지를 확인한다. 해결되지 않으면 감정인을 몇 날 며칠 잠 못 들게 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경험 많은 선배들의 조언을 통해 신내림(여러 수집한 정보를 통해 추정한 중독원인 물질이 맞는 상황을 말하는 감정인의 속어)을 받기도 한다. 때로 냄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냄새를 맡는 능력은 자타공인 최고다. 다른 지역 연구소로 출장 간 김에 민원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냄새를 맡았다. 비누화 반응이 일어났군. 이거 pH는 9는 넘겠는데, 이 말에 후배는 이제 냄새로 pH까지 아는 거냐며 너스레를 떤다.
봄날 마당 한가운데 왕겨를 쌓는다. 안에는 바람을 불어넣을 구멍 뚫린 관을 넣고 풍구를 연결해 두었다. 아직 풍구를 돌리는 일은 7살 꼬마에게도 가끔 주어졌다. 호기심 많은 아이는 분주한 할머니에게 무얼 하시는 중이냐고 묻는다. 잿물을 만드시는 것이란다. 일이 모두 끝나면 짙은 갈색 덩어리의 비누가 만들어졌다. 이후에는 서양으로부터 온 잿물인 양잿물(가성소다, 수산화나트륨)을 사서 비누를 만들곤 했다. 그 비누를 만들 때 특이한 향이 있다. 위 내용물의 성분 검사를 하는 과정 중에 알칼리성으로 바꾸는 과정에서도 위 내용물에 지방이 많으면 비누 만들 때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아무 처리도 하지 않은 위 내용물에서 비누화 반응 냄새가 확연하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위 내용물에서 비누화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부패와 동반되어 pH가 알칼리성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부패취와 섞여 비누화 냄새만 나는 것은 어렵다. 탄수화물이 많은 상황에서 미생물이 자라면 초산 등을 만들어지며 산성이 되지만, 단백질이 많은 경우, 부패하면서 트립타민과 같은 알칼리성 물질이 많아지며 알칼리성이 된다. 위 내용물의 조성에 따라 부패하면 알칼리성이 될 수가 있고, 비누화 반응이 일어날 수 있지만, 이 경우라면 부패취가 강해야 하는데 비누화 반응 냄새만 선명하다. 무언가 이렇게 만든 물질이 있다. 알칼리성인 어떤 물질을 음독을 가능성이 있다. 양잿물은 부식독으로 상대적으로 많은 양을 음독사에서 점막 손상, 위장 출혈을 동반하는데 특이점이 없으니 배제된다. 알칼리성이면서 치사량이 낮은 물질로 압축된다. 청산은 기본적인 시험에 포함되어 시행되었으니 배제된다. 이제 이런 물질에 집중하면 될 일이다. 더 시도해 볼 것이 없던 민원은 더 확인해 볼 것이 생겼다. 선배, 동료는 거들뿐, 답을 찾는 일은 주 감정인의 몫이다.
부검은 법의학 분야에 의뢰된 후 생체시료를 채취해 원내 의뢰를 통해 들어온다. 대부분 수사 정보가 잘 정리되어 있고, 정보 요청에 경찰도 협조적이지만, 물고기, 벌, 가축, 농작물 등 물고기 폐사와 같은 사건은 관련 정도를 얻기도 어렵고, 수사기관도 상대적으로 비협조적이다. 워낙 다양한 사건에 다양한 시료들이 의뢰되어 경험과 순발력이 필요한 분야이다. 각 시료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고 어떤 것들이 있는지 시험 족보처럼 공유되지만, 항상 의외의 것들이 처음 검출되는 것들이 있다. 비둘기나 철새의 폐사에 급성 독성은 위보다 모래주머니를 주요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라든지, 물고기는 물을 거의 마시지 않으니 물이 가장 많이 지나가고 혈관이 잘 발달한 아가미를 주요 대상으로 해야 한다느니, 제초제로 나무를 죽게 할 때는 나무 밑동에 구멍을 뚫어 제초제를 넣으니 그런 부분을 찾아보고 발견되면 그 부분만을 잘라 보내게 한다는 식의 기준이 있지만, 상황은 늘 다르다.
폐사된 물고기와 푸른색이 역력한 물이 의뢰되었다. 산업폐기물 처리 시설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소방차가 출동해 화재를 진압한 후 인접한 강에서 발생한 물고기 폐사 사건이다. 이미 수질 관련 기관에서 수질 검사를 시행했고 여러 유기 용제 유와 수질과 관련된 자료가 첨부되어 있었다. 물고기는 어차피 폐기물 속의 폐기물에 있던 유독물질과 화재로 발생한 유독물질 등으로 인한 폐사로 입증이 어려울 것이고, 폐사가 충분히 설명되는 상태라 의미 없어 보였다. 아마도 가장 궁금한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물의 파란색이리라. 어찌 풀어 갈지 막막하다는 후배의 민원이다. 화재가 발생한 업체에서 제출한 산업폐기물 목록에는 없지만, 그 기록을 믿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색깔에 집중했다. 저렇게 색을 낼 수 있는 것은 식용색소와 황화구리나 염화구리와 같은 구리 이온 정도가 떠오른다. 식용색소는 식품 실에 의뢰해 확인하고 구리 이온을 확인해 보도록 했다. 이 사건은 물고기 폐사가 아니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 물의 푸른색이었다. 물고기 폐사 원인은 너무나 복합적이어서 알 수 없지만, 푸른색은 식용색소 청색 1호(brilliant blue FCF)였다. 이 색소에 대한 어독성 자료를 참고사항에 적어 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다. 신내림을 잘못 받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이 민원은 신내림을 받아 해결되었다.
무녀가 신내림을 잘 받으려면 치성을 드리고,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한다. 법독성학자가 신내림을 잘 받으려면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