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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ke Apr 26. 2024

독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독성학(30)

무작위성과 다양성

    각종 뉴스에서 어느 정신질환자의 「묻지 마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보도들이 쏟아진다. 여러 사람이 피해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메모와 꽃을 꽃다운 나이에 사고를 당한 그녀와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사건 현장을 방문한다는 보도가 나온다. 이를 접한 후배들은 격분하며 저런 사람은 사회에서 격리해야 한다고 한다. 참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며, 이러한 반응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마음 한쪽에 편치 않음을 느낀다. 죄는 벌을 받아 마땅하고 그 죄의 경중에 관한 판단은 사법부의 몫이라는 생각으로 다잡아 본다. 그러나 피해자 가족과 지인의 슬픔도 있지만, 정신병적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자녀를 둔 가족과 지인들의 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안정된 사회,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 등 환경적 요인뿐만 아니라 유전적 요인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며칠의 깊은 고민 끝에 「묻지 마 살인」은 가해자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생물학적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의 실험이며 우연의 산물이다. 무작위적인 조합에 의해 유전자의 구성이 이루어지고, 면역체계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양성은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동인이 되어 왔다. 무작위성은 개체에는 때로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하고, 인간과 같이 집단생활을 하는 종에서 그 집단에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종은 그 다양성으로 인해 환경변화에 적응하는 기회를 얻는다. 한 종의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다른 한 종을 모두 없앨 수 없다는 미생물학의 경구(警句)는 다양성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좋은 예이다.

    잘 알려진 유전병 중 겸상적혈구 빈혈증이 있다. 헤모글로빈을 만드는 유전자 이상으로 부모 모두에게서 이 유전병을 받을 경우, 산소운반에 불리하고, 혈구가 쉽게 파괴되어 느린 성장, 빈혈, 감염 가능성 증가, 파괴된 혈구가 혈관을 막아 각종 합병증을 유발하여 90%가 20세 이전에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전병이다. 그러나, 부모 중 한 명에게만 받는 경우, 별다른 이상 없이 생존하며, 말라리아에 대한 저항성이 증가하여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거나 걸리더라도 가볍게 앓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지역에서 유병률이 높은 질환이다. 겸상적혈구 빈혈증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개체나 종의 유지에 불리한 요소이지만, 말라리아가 주는 위험과 겸상적혈구빈혈증이 가지는 위험 사이에 유전변이는 나름의 적절한 선에서 유지되며, 말라리아로부터 집단을 일정 부분 보호하는 작용 하였으며, 말라리아가 창궐하지 않는 지역에서 이 돌연변이는 생존확률이 낮아 유병률이 극히 낮다. 생명체는 유전자를 통해 유전정보를 후대에 넘겨주며, 넘겨주는 과정에서 일정 수준의 변이를 갖도록 진화해 왔다. 안정된 환경은 변이가 특정 방향성을 가지게 하지 않아 종 전체에 드러나지 않겠지만, 만약, 한 종이 같은 유전적 특성, 성향, 면역적 특성을 갖게 된다면, 그러한 종은 환경변화나 새로운 감염병이 나타날 때 취약할 수밖에 없다.

    대사나 물질의 작용에 관점에서도 생물학적 다양성은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특정 물질을 잘 대사 시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특정 물질을 잘 대사 시키지 못하기도 한다. 또 어떤 물질에 민감한 사람도 있고 둔감한 사람도 있다. 이것은 때로 장점이 되고 때로 단점이 된다. 특성이 장점이 되는지 단점이 되는지는 상황이 결정할 뿐 어떤 것도 우월한 것은 없다.

      무작위성과 다양성이 개체나 종에 부정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적 관점에서 환경변화에 적응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해왔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인류는 과학의 발달로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며, 문명화된 사회를 이룩하고 있어 환경적 요인뿐만 아니라, 유전적 요인이 개인의 선택이 아님을 받아들이고 질환에 의한 범죄에 좀 더 이성적인 대책 마련에 사회적 합의를 위한 진지한 고민이 동반되어야 한다. 특히, 복잡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환경적 요인은 그 취약성이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태어난 것 자체가 개인의 선택이 아니듯 유전적인 특성 또한 개인의 특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폭행이 사회문제로 주목받으며, 2011년 화학적 거세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다. 이 법이 시행되기 전 국립법무병원이 공주에 있어 대전에서 근무한다는 이유로 사전 연구에 참여하였다. 당시 성폭행, 특히, 아동 성폭행에 대한 사회적 분노는 화학적 거세가 아닌 물리적 거세를 주장하고 있었지만, 문명화된 사회에서 물리적 거세를 시행하기란 쉬운 선택도 바람직한 선택도 아니었으리라. 당시 연구는 화학적 거세에 사용된 약물이 효과적으로 혈중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떨어뜨리고 유지되는지와 사후 모니터링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수감자 중 개인의 동의, 동의가 자발적인지에 대한 심리전문가 검토, 전문가 위원회를 통해, 투약자가 결정되었다. 연구에 참여한 투약자는 갓 스물 정도의 청년으로 스스로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여, 수감 중에도 수시로 자위행위를 하며, 그런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자책하는 상태였다. 약물 투약 후 그 청년은 이제 자신이 사람으로 생각되며, 자기 머릿속을 지배하던 성적 욕구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했다고 전해 들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들었다. 성범죄도 범죄이고 사회적, 문화적, 환경적 요인과 더불어 이보다 더 어쩔 수 없는 유전적 요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던 나 자신의 편협함에 대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사회적 합의로 가중처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법률에 기반하고 사정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제는 성범죄라 하여 예외일 수는 없다. 살인도 함부로 사형으로 다루지 않듯, 성폭행범이라 하여 물리적 거세를 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등가로 보이기 시작했다. 화학적 거세는 엄격한 기준에 의해 전문가에 의해 평가되고 제한된 범위에서 시행된다. 화학적거세자 후 치료 효과가 좋은 경우, 위원회를 통해 가종료 판정이 나면, 일정 의무를 부과하여 사회로 복귀하기도 한다. 이때, 1달에 1회 이상 1년에 1회 이상 불시에 테스토스테론 수치와 화학적 거세의 작용을 거스를 수 있는 약물을 투약하지 않는지, 발기부전치료제를 복용하지 않는지에 대한 검사를 받도록 강제된다. 

    화학적거세자에 대한 모니터링 방법을 체계화한 후, 정신질환으로 범행한 사람들에 대해 가종료 제도를 확대를 위한 사전 연구에 참여하였다. 정신질환으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약물을 정상적으로 복용하면 사회생활에 별 무리가 없는 경우가 많으며, 일정 수준의 치료 후에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치료 효과와 사회복귀율이 높일 수 있음을 강조하지만, 병상 부족도 가종료 제도 확대의 한 요인이다. 정신질환도 환경적 요인뿐만 아니라, 유전적 요인도 크게 작용한다. 유전적으로 취약하게 태어나기도 하고, 같은 강도의 스트레스에서 누군가는 병적 상태가 되고 누군가는 견딜 수 있다. 두 요인은 정확히 측정될 수 없으며, 단편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아무도 누군가의 경험과 느낌을 고스란히 겪을 수는 없으며, 유전적 특징이 개인의 선택이 아니므로 죄는 벌하되 사람은 따로 떼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가종료 때 약물 복용 의무 부과를 받은 출소자에게는 부과된 의무기간 동안 약물 복용이 강제되며, 1달에 1회 이상 1년에 불시에 1회 이상 약물을 성실하게 복용하는지 주기적으로 검사받는다. 화학적거세자, 가종료 모니터링 모두 수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듯 보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국립법무병원의 영어 명칭은 National Forensic Hospital이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영어명은 National Forensic Service이다. 국립법무병원의 Forensic은 광의로 법무를 나타내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Forensic은 협의로 법과학을 뜻한다. 이 둘을 거슬러 올라가면 만난다. 법독성학이 수사 감정으로 사회 안전에 기여와 수형자의 사회복귀에 이바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업무 증가에도 증원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서 동료, 후배들에게 부담이 되어버렸지만, 법독성 분야에서 해야 하는 일임은 분명하다.

    십 대 후반의 아이는 항상 웃는 얼굴로 마을 어귀를 서성이거나 어정쩡한 뜀박질을 하곤 한다. 철없는 꼬마들에게 놀림의 대상이거나, 또 다른 무리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놀리는 아이들도 내심 그 소년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름에 대해 무지할 때, 사람은 위험으로 인식하고 두려움을 갖는 경향이 있다. 처음에는 등굣길을 막고 있는 그 소년을 피하고 싶었지만, 돌아갈 길이 마뜩하지 않으니 나름의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무리 중 선봉에 나서서 소년을 괴롭히는 꼬마는 무리에서 용감한 아이로, 문제를 해결한 아이로 인식되며 그러한 경향이 강화되었을 뿐, 누구도 마음속에 그 소년을 괴롭힐 마음은 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그 소년이 마을 어귀에서 멀어지면 소년을 괴롭히거나 하지 않았지만, 소년을 놀리는 데 동참하는 무리는 한동안 커져만 갔다. 소년의 어머니 또한 속마음이 어떻든 항상 웃는 낯으로 밝게 지냈지만, 어느 날인가 그 소년도 보이지 않았고, 소년 어머니의 웃는 낯은 다시는 보지 못했다.

    유전적 요인 등 이 무작위성에 기반한 다양성으로 인해 누구나 태어날 때 몇몇 가지의 다름을 가지고 태어나며, 일부는 치명적 약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약점들이 사회적, 문화적 요인과 합쳐져 범죄라 불리는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유전적 다양성을 어찌할 수 없다면, 사회적 문화적 요인을 줄여 이러한 현상을 줄이고 예방해 나가야 한다. 마음이 아픈 사람도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같은 존재이며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이며, 이 사회의 일원이다. 격리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회복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으려는 노력, 문명화된 사회가 갖추어야 하는 필요조건 중 하나일 것이다. 정상인의 범주에 든다고 여겨지는 사람 중에도 강력 범죄자가 있고, 비정상인의 범주로 여겨지는 사람 중에도 누구보다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도 있다.

    누구도 자신의 환경이나 유전적 특성을 선택한 것이 아니며,  환경이나 유전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양한 특성의 사람이 보다 안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고 보완해 가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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