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서머셋 모옴, 달과 6펜스 (민음사, 2013)
제프는 TV인형극 사회자로, 극 중 피클스 아저씨를 연기한다. 피클스는 인형들의 고민을 들어주며,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는 어른이다. 피클스는 제프로 살아갈 때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길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아픈 아이를 찾아가 위로한다. 병실에 누운 아이가 피클스 아저씨에게 묻는다. ”TV에서 어떻게 나왔어요?” 피클스는 대답한다. “진짜 어려운건 나오는게 아니라, 다시 들어가는 거야.”
제프는 어린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경험했다. 그래서일까 제프는 사랑과 결혼에 자신이 없다. 행복해질 수 없을 까봐 두렵다. 제프는 사랑하는 여자의 고백에도, 아이들의 피클스 아저씨로 살고 싶다며 떠나 보낸다. TV인형극에 특별출연 한 달라이 라마는, 일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제프에게 그의 감춰진 두려움을 일깨워 준다. 일에 대한 소명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기억과 두려움. 달라이 라마는 제프에게 말한다. “행복은 현재에 집중할 때 나타나는 것 입니다.” 제프는 깨달음을 얻은 듯 방송국을 뛰쳐 나간다.
고통을 감내하는 인간은 숭고하다. 고통을 삼키는 제프는 숭고하다. 카메라 안밖으로 쏟아지는 시선들,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중압감, 그를 속이고 위협하는 사람들, 뜻대로 되지 않는 가족관계. 무대 밖 제프의 삶은 그림자로 가득하다. 제프는 날마다 비명을 삼킨다. 반대로 스트릭랜드는 숭고하지 않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에, 아내와 자녀들을 남겨둔 채 파리로 떠났다. 자신을 도와준 스트로브에게는 신의를 저버리고, 그의 아내 블란치는 스트릭랜드의 무관심에 죽는다.
스트릭랜드는 두려움에도 무관심하다. 그의 관심은 순간의 즐거움과 그림 뿐이다. 그는 내일 굶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부탁을 거절 당하면 다른 이에게 다시 손을 내밀 뿐이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은 스트릭랜드를 현재에 머물게 했다. 그는 미술계의 인정이나 그림을 팔아 먹고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그림으로써의 그림을 욕망한다.
행복은 현재에 집중할 때 나타나고, 화가는 그림을 통해 현재에 머문다. 붓이 캔버스에 닿을 때, 그림은 작은 변화를 거듭한다. 기름내 나는 물감은 화가의 몸짓을 통해 하나의 그림이 된다. 중첩된 물감은 몸짓의 축적이다. 화가의 현재는 그림 안에 그려져 있다. 스트릭랜드는 그림 앞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언제부터일까. 달의 자리에 금화가 반짝인다. 손을 뻗어도 금화는 닿지 않고, 달은 떨어져 바닥을 뒹구른다. 6펜스 가격표를 붙인채. 달을 쫒아 왔건만 노력에 값을 매기는 이는 없다. 땅에 떨어진 달을 집어 들고, 나의 현재를 묻는다. 스트릭랜드의 현재는 그림 앞에 있었다. 제프의 현재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 있다. 진짜 어려운 것은 나오는게 아니라,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주머니에서 헛도는 달을 만지며 생각한다. 어제는 고통스러웠고 내일은 불안하다. 현재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잊어야 한다. 스트릭랜드처럼 무시하거나 제프처럼 용기를 내거나 말이다. 잊든 무시하든 맞서든. 캔버스 앞에 붓을 들면 알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면 알게 될 것이다. 현재를 마주할 용기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