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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헤 Apr 29. 2024

모태신앙인의 템플스테이

DAY 2


봉선사의 아침 공양은 6시였다.


너무 오랜만에 바닥에서 자서 그런지 몸이 쑤셔서 몇 번을 깼다.

한옥이 기본적으로 웃풍이 있는 데다 내 방 위치가 바람이 부는 가장 바깥쪽이어서 그랬는지 자다가 깨면 코가 시렸다. 그래서 입고 온 패딩을 거꾸로 뒤집어쓰고 잤다.      


사실 자기 전까지도 예불을 참관해보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새벽기도도 안 나가는 애가 새벽예불 본다고 새벽같이 일어나면 나의 신이 노하실 것 같고 그렇다고 예불을 참관(을 빙자한 구경)하자니 이쪽 신이 노하실 것 같아서 새벽에 잠시 깼을 때 5시 10분에 맞춰 놓았던 알람을 살며시 5시 50분으로 바꾸었다.      


5시 50분에 일어나 부지런히 아침을 먹으러 갔다.

사실 아침 조식 막 엄청 타이트하게 챙겨 먹는 스타일 아닌데요, 전날 저녁 식사가 오후 5시였거든요...

평소에도 간헐적 단식까지는 아니지만 저녁과 다음 날 아침까지 12시간 정도의 공복 상태를 실천하면서 살려고 하는데 식사 시간이 깨져서인지 배가 많이 고프더군요.   

   

역시 조식은 민낯으로 먹는 맛이죠? 어쩌다 보니 정확하게 6시 땡! 하고 들어갔더니 나밖에 없어서 조금 머쓱했지만 잠시 후에는 전날 저녁 공양 때 눈에 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들어와서 부족한 잠을 좀 더 잤다.

휴식형이란 이런 맛이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양껏 쉴 수 있어 좋았다.      


*     


10시에는 스님과의 차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것 또한 선택사항인데 내가 언제 또 스님과 차를 마시겠나 싶어 냉큼 신청했다.     


제대로 된 다도 시간을 기대했건만 생각보다 간소하게 준비되어 있던 차 도구들.

연잎 차를 마셨는데 생각보다 달고 맛있어서 연거푸 몇 잔을 내려 마셨다. 아주 연하게 더 이상 맛이 우러나지 않을 때까지.     


어디서 온 누구고 무슨 일을 하는지 간단하게 소개를 하면서 대화하고, 또 템플스테이 경험이 어땠든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는데 20~30대의 혼자 온 여자분들이 많아 신기했다.     

또 부모님 또래의 분들은 불심 깊으신 불자들로(이 표현이 맞나?) 국내 각지의 유명한 절들에서 템플스테이를 주기적으로 하시는 분들이셔서 서로 신기해하며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예전에는 일회성으로 흩어질 인연이라면 나를 설명하고 이야기 나누는 그런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다소 소극적으로 나를 말하고, 다른 사람도 딱히 궁금해하지 않았었다.

나이가 들어 그런 건지, 내 성격이 조금은 변한 건지 지금은 이런 자리에서도 나를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고 오히려 잠시의 만남이어서인지 더 솔직하고 가감 없이 이야기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     


그렇게 차담까지 모든 일정이 끝났다.      


하지만 나의 일정은 이게 끝이 아니지.

템플스테이를 신청할 때 봉선사의 다른 프로그램들을 훑어보다가 <숲길 걷기 명상>이 있어서 신청해두었다.      

세조가 사랑하여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일반인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는, 유네스코 지정 생물권보전지역인 광릉 숲 길.      


숲길 + 걷기 + 명상 + 유네스코 조합이라니, 못 참지.      


퇴실부터 프로그램 사이에 시간이 좀 비어서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시며 또 노곤하게 멍을 때렸다. 이번에는 잔잔한 재즈 음악을 들으면서 느긋하게.      


*     


신청한 시간이 되어 템플스테이 사무실 앞으로 가니 어제 입실 때부터 설명해주시던 사무실의 직원분이 등산화를 신고 나오셨다. 근데 어라 신청자가... 저밖에 없다고요...?    

 

원래는 5인 이하면 자동으로 취소가 되는데 나는 템플스테이 하신 분이어서 그냥 취소 안 시키시고 진행하기로 하셨다면서 졸지에 사무실 직원님과 단둘이 1시간의 산행을 하게 되었다.


자 이제 나와 E자아. 열심히 일할 시간이야.      


잠시간의 당혹감은 있었지만 숲길의 빗장을 열고 들어간 지 5분이 채 되지 않아 이건 나에게 참 호사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릉 숲길은 개인은 들어갈 방법이 없고 봉선사를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나 또한 당연히 취소되어야 마땅한 상황에 어찌 보면 호의를 베풀어주셔서 숲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으니.      

*     


산속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우리 둘의 발소리와 말소리 그리고 간간히 들리는 새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우리가 밟는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

뛰어가는 다람쥐(혹은 작은 청설모).     


그 외에는 사방이 고요했다.


그와 같은 경험을 또 어디에서 할 수 있을까?     

두런두런 나누는 말소리가 멈추면 찾아오던 정적 같은 고요.    

  

산을 많이 다녀본 건 아니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아 길들이 잘 닦여있지 않은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참 좋았다.      


사방에 이름 모를 나무들과 눈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평화로웠던 광경.      


*


또래였던 직원분의 “혹시 결혼하셨어요?”를 시작으로 좋은 남자는 어디에 있냐며로 물꼬를 제대로 튼 우리는 어느덧 언니 동생이 되어 다음에 연꽃 필 때 꼭 다시 오겠노라 그때는 꼭 서로 노력해서 인연을 만들어 붙잡고 있자, 혹은 누가 없어도 혼자라도 오겠다는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헤어질 때는 절친인 양손까지 꼭 붙잡고 서로에게 덕담을 빌어주고 웃는 얼굴로 헤어졌다.     


명상은 없고 숲길 걷기 수다의 시간이었지만, 정말로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 다시 떠올려도 저절로 웃게 되는 시간.      


*     

여기에서 이 여행이 끝났다면 참 안온한 여행이었을 텐데...     


지금부터 공포의 귀갓길이 시작됩니다.     


봉선사에서 나와 고속도로를 타고 시속 100km를 밟는 순간부터 내 차에서는 애써 무시하려고 해보아도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차량 앞쪽의 보닛에서 덜덜거리는 소리가 점점 심해졌는데 경고등은 켜진 것이 없었다. 분명 처음에는.      


이 정도 속도로 밟다가 차가 퍼지거나 하면 나만 죽는 게 문제가 아니고 크게 사고가 나겠구나 싶어 아찔했던 상황에서 속도가 줄어들면 소리도 같이 줄어들기를 몇 번.      


어제 봉선사에 들어오며 며칠 뒤 점검하러 가려고 했던 생각을 고쳐먹고 바로 정비소 가는 루트로 바꿨고 네비에서 1시간이 뜨는 걸 보고는 그때부터 기도했다.      


시간은 오후 1시 37분이었는데 제발 차야 3시까지만 버텨줘(가다가 차 막혀서 시간 늘어날 수 있으니까 쪼끔 넉넉잡아서) 제발...     


운전경력 10년이 넘어가는데 이렇게 무서워 보기는 처음이었다. 덜덜덜덜덜 떨면서도 차를 멈추지 않은 것은 이미 올림픽대로 한가운데라 갓길도 없었고 차가 퍼지면 달려올 렉카들 뿌리칠 기운이 없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경고등도 안 뜨고 소리만 나는 상태인데다가 속도를 줄이면 소리도 줄어들어 문제가 있긴 하지만 차가 멈추거나 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해서 그냥 쭉 운전했던 건데 그때부터 서지도 못하고 달리지도 못하는 공포의 귀갓길 레이스가 계속되었다.      


올림픽대로에서 시내로 들어오면서야 비로소 엔진 경고등이 떴고 정비소 들어가기 전 마지막 사거리에서는 기어이 경고등이 몇 개 더 뜨며 삐요 삐요 난리가 났다(이 소리는 그냥 머릿속에서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매우 비상).     


그리고 마치 시트콤처럼 3시쯤 정비소에 들어가기 직전에 핸들이 안 돌아가며 왕복 8차선에 멈춰 선 나의 차. 차가 완전히 방전되었다. 차에서 내려 뛰어 들어가서 바로 사장님을 불러와서 점프시켜 겨우 차를 끌고 들어갈 수 있었다.      


정비소에서도 여기까지 온 게 천만다행이라고 발전기의 벨트가 끊어져서 전기까지 다 끌어 써서 배터리까지 나간 거라고 설명해주셨다.


*


차 수리에는 시간이 걸려서 맡기고 캐리어를 끌고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예상치 못한 일이 마지막에 있었지만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그저 웃음이 났다. 그냥 사고 없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이 감사했다.      


템플스테이를 다녀왔지만, 다행히 내 기도가 먹혔다는 안도감도 함께.      


예상치 못하게 마지막에 스릴을 가미한 시트콤 한 편을 찍었지만 그래도 그게 시트콤으로 끝나서 어디인가 중간에 사고라도 났으면 영화 한 편 찍었을 텐데 말이죠.      


*     


휴식과 힐링이 간절해서 떠났던 1박 2일.      


그에 더해 사색과 웃음과 시트콤 한 편까지.      


날이 너무 더워지기 전에 또 한 번 훌쩍 어딘가 좋은 곳으로 떠나고 싶은 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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