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신도에서 해방의 사유자로
현재 한국은 인문학이 경시받는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학은 그저 불필요한 낭만과 감성으로 치부되고, 교육도 이에 발맞추어 실용학문과 과학적 사고를 기르는 교육을 전 사회적 차원에서 증가시키고 지원하고 있다. 학과를 선택하는 고등학생들 입장에서도, 취업도 어렵고 공부의 양은 제일 방대한 이 학문을 택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도 중학생까지의 꿈은 법조인이 되는 것이었다. 위인전을 읽으면 대부분은 변호사, 검사, 판사 출신이었고 어린 나에게 법조인이란 직업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경제학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수학적 방법론과 모델링에 경도된 주류경제학이 아닌 지난 약 300년간의 자본주의를 통계와 역사로 강렬히 비판하는 [21세기 자본]을 통해서 말이다. 법조인을 꿈꾸었던 내게 피케티는 이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하에서 인류는 왜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가", "과연 더 나은 사회는 불가능한가" 등 프랑스의 한 교수는 나의 눈을 개안시켰다. 그리고 피케티의 질문은 "왜 불평등은 부정의한 것인가"라는 또 다른 의문으로 이어졌다.
불평등을 연구해야 했고, 그 기원과 자본주의 체제와의 연관성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인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맑스'였다. 이러한 나의 상기는 과거 아버지의 추천으로 읽었던 유시민 작가의 [청춘의 독서]에 소개된 [공산당 선언]으로 이끌었고, 이 짧은 글은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사유를 전복시켰다. 비록 중 3의 어린 내가 변증법적 유몰론 같은 그 안에 담긴 철학적 함의를 이해하진 못했으나, 맑스의 강렬하고 현란한 문체, 짧지만 가슴을 울리는 선언들은 중 3의 나를 맑스주의의 길로 이끌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불평등은 필연적인 법칙이며, 이는 프롤레테리아들의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라는 맑스의 주장은 중 3의 내가 정답을 찾은 듯한 자신감, 아니 어찌 보면 오만으로 이끌었다. 또한 고 1 때 겪은 아버지의 죽음은, 나의 사유를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처럼 맑스로 이끌었다.
그때의 나는 부정할 수 없는 맑스주의자였다. 무조건적인 필연은 아니더라도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사회를 구현하리라 믿었으며, 그 사회는 맑스가 말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과 일치하는 사회일 것이라 생각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며, 자본주의의 붕괴만이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러기 위해서 전위당이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나는 수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사유는 또 한 명의 철학자를 만나고 붕괴했다. 사실 이러한 사유의 결이 무비판적으로 내게 유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맑스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과학주의와 권위주의, 엘리트주의는 그 당시 나에게도 반감을 주었으나 그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과도기라는 이유로 나는 맑스주의자임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우연히 나는 벤야민을 만나게 되었고, 벤야민은 나의 사유를 하나하나 반박해 가며 내가 주창해 온 진보가 그저 승자들의 기만일 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벤야민이 내게 던진 질문은 흔하디 흔한 "맑스주의가 과학적인가?"라는 포퍼적 합리주의 전통의 질문이 아니었다. 벤야민은 내게 "너의 사상이 해방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맑스주의가 해방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온 내게 벤야민의 질문은 나의 사상 체계 전반을 무너뜨렸다. "만일 나의 사상처럼 노동자 계급이 지배하는 세상이 온다면, 인류는 해방될까?"와 같은 고민은 나의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만일 맑스주의가 해방이 아니라면 나의 사상 체계에서 대안은 지워지는 셈이었다. 나는 그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는 무지한 학자로 전락하는 것이 싫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자본주의를 긍정하며 점진적인 개혁을 바라는 학자가 되기는 더욱더 싫었다. 나의 사상적 혼란은 나를 끊임없는 방황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방황 끝에 도달한 것은, 다름 아닌 벤야민과 아도르노였다.
그리고 현재, 벤야민은 나의 사유 체계와 하나가 되었다. 승자들에 의해 쓰인 역사의 긍정적인 면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승자들에 짓밟히고 지워진 패자들의 역사. 즉,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부정의 상태였다는 인식, 그리고 그 부정에서 피억압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전위당도, 혁명가들도 아닌 과거의 부정을 간직하고 기억하는 지금의 우리라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체화시켰다. 이러한 사유의 구체화는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을 나의 사유 속에서 체계화할 수 있게 하였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긍정을 향해 나아가는 끊임없는 부정의 역사였다. 부정으로 인해 변화한 세계는 긍정이 아닌 또 하나의 부정의 세계였으며, 그 부정의 세계는 긍정을 향해 나아가는 주체들로 인해 다시 한번 변화했다. 사회가 모순에 의해 변화한다는 점에선 맑스주의와 동일하지만, 맑스주의가 헤겔의 변증법과 같이 긍정의 요소를 수용한 것에 비해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기에 맑스주의적으로 아도르노를 해석하는 연구자들은 아도르노를 비관주의자, 부르주아적 철학자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벤야민의 전통에서 아도르노를 읽은 나에게 부정변증법은 벤야민의 조각조각 흩어진 사유들을 체화하고 있던 나의 사유를 잇는 하나의 줄기가 되었다.
벤야민과 아도르노는 과학에 매료되어 인간과 생명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철학을 생명주의로 다시 되돌려놓았다. 비로소 나는 인문학자로 돌아왔고, 그 복귀의 과정은 나를 단순히 이념을 신봉하는 하나의 신도에서,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주체로 이끌었다. 지금도 나의 사유는 계속된다. 이제 그 사유의 중심에는 생산력도, 계급도, 그 무엇도 이성이 아니며 긍정이 아니다. 오직, 생명과 해방의 추상들만이 부정의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