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하다.
늦었다.
헐레벌떡 전속력으로 뛰어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쉬는 날 대전에 있는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길. 이 시간만 되면 늘 쓸쓸하다.
원하던 직장에서 인턴생활을 마치고 정규직까지 골인하게 되었지만 낯선 서울 땅으로 발령받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장거리 롱디커플이 되게 된 것이다.
휑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에어팟을 낀다.
콩나물.
요즘 사람들이 에어팟을 부르는 용어다.
콩나물처럼 생겼다나 뭐라나.
무선 이어폰이 최근 유니크 한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에어팟을 끼고 있는 사람들이 엉킨 이어폰 줄을 풀고 있는 사람들을 안쓰럽게 바라본다.
무심하게 노래를 한 곡 틀어본다.
오늘의 선곡은
응답하라 1988의 OST인 김창완의 [청춘]
「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
지하철 창문에 내 얼굴이 비친다.
스물일곱. 지금 내 청춘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여자친구랑 계속 이렇게 장거리 연애를 하는 게 맞는 건가. 이 여자랑 결혼은 할 수 있을까. 훗날 이 노래가 나의 구슬픈 연가가 되는 건 아니겠지.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 한 분이 나에게 쓰러지듯 바짝 기대어 말을 건다.
"켁켁. 미안하네. 혹시 나 좀 도와줄 수 있겠나?"
검은 정장에 하얀 셔츠.
알 수 없는 브랜드의 반짝이는 손목시계.
거기에 서류 가방까지.
멋쟁이 노신사 분이다.
아무리 멀끔한 외모라고 해도, 나에게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와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불편하다. 멀끔한 겉모습이 노인 특유의 냄새까지 지워주지는 않기 때문에.
순간 미간이 찌푸려질 뻔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그래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노신사이니까.
"네, 어떤 걸 도와드릴까요?"
노신사가 돋보기 안경을 치겨 세우며 핸드폰을 멀찍이 보여준다. 나에게도 노안이 찾아온 줄 아나 보다.
"내가 서대전역에서 이 열차를 타고 서울로 갔어야 하는데 놓쳐버렸네. 이 표를 반환해 줄 수 있겠나?"
이 정도 부탁이야 껌이지.
클릭 한 번만 하면 되는걸.
"반환되셨어요. 이제 어떻게 서울로 가시려구요?"
"다시 서대전역에서 열차를 알아봐야지. 고맙네. 서대전역이 다음 역 맞지?"
노신사가 급하게 서류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르신 잠시만요! 서울 가시는 거면 서대전역보다는 대전역에서 KTX 타시는 게 더 나으실 거예요. 서대전역에는 열차가 별로 안 서요. 마침 저도 서울역 가는데 대전역에서 같이 내리시면 될 것 같아요"
노신사가 마침 잘 됐다는 느낌으로 환하게 웃는다.
"허허 잘 됐구먼, 고맙네. 나이 먹으니 이런 간단한 것도 혼자서 하기 버거워질 때가 있더라고. 자네는 왜 서울에 가는 건가?"
개인적인 질문까지 하다니.
대전역까지 말동무나 되어 드려야겠다.
"내일 출근이라서요. 본가는 대전인데 직장은 서울이에요."
"무슨 일을 하고 있나?"
"공기업 다녀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이지요."
"이야. 멋진 직업이야. 나도 어렸을 때 자네 직업을 꿈꿨었다네."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덧 대전역에 도착했다.
"어르신, 내리시지요!"
"어르신! 저기 매표창구에서 표 끊고 타시면 될 것 같아요. 저는 20시 04분 차라 먼저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올라가세요!"
노신사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마치고 서둘러 편의점으로 향한다. 캔맥주 두 캔과 새우깡 하나를 집어 든다. 아무리 바빠도 열차 안 캔맥주는 참을 수 없기에.
열차의 맨 끝 칸 자유석에 도착한다.
취익- 똭.
꼴깍꼴깍.
시원한 캔맥주에 짭조름한 새우깡의 조합.
끝내준다.
에어팟을 끼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준비를 한다. 오늘은 서울 가는 열차 안에서 어떤 영화를 볼까나. 서울 가는 열차 안은 나에게 영화관과도 같다.
위이이잉.
곧이어 서울행 열차가 대전역을 출발한다.
슬슬 영화에 집중 좀 해볼까 하는 찰나,
누군가가 나를 또 톡톡 친다.
'아 오늘 나를 찾는 사람이 많네..'
으이?
"헥헥. 여기 있었구먼. 자네랑 같이 올라가려고 이 표 끊었어. 18호차까지 한참을 찾았구먼"
이 어르신 왜 이래. 집착 쩌네.
나는 혼자 가는 게 더 편하다고.
이번에는 표정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듯하다.
떨떠름한 표정이 그대로 노신사에게 송출된다.
"아.. 저를 일부러 찾으신 거예요? 심심하셨나 봐요. 제가 말동무해드릴게요 옆에 앉으세요. 맥주 하세요?"
딱 나 먹을 만큼만 사 온 캔맥주인데 노신사에게 호의를 베풀어본다. 그래도 옆에 있는데 나만 먹을 수는 없으니.
노신사가 고개를 젓는다.
"나는 맥주는 괜찮으니 나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먹게나. 젊었을 때는 좋아했는데 나이 드니 잘 안 먹게 되더라고."
혼자서 여유롭게 있던 사람 옆에 앉은 게 누군데.
신경 쓰지 말고 먹으라니. 상황이 참 재밌구만.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나니 정적이 흐른다.
오늘 처음 본 20대와 70대. 직업과 고향 뭐 하나 겹치는 것 없는 관계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도 노신사는 꿋꿋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려 한다.
"나는 오늘 대전에 있는 친구들과 모임을 하고서 서울로 다시 올라가는 길이라네. 집은 종로 쪽이고 몇 년 전까지 대표로 있다가 지금은 은퇴하고 계열사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네."
오 CEO.
갑자기 간지 작살이다.
"어쩐지, 옷도 말끔하게 입으시고 서류 가방도 똭 매시고.. 딱 품위가 있어 보이세요. 궁금한 게 있는데 그 서류 가방에는 뭐가 들어있어요?"
남의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물어보는 게 무례하긴 하지만 궁금한 건 참을 수 없다.
노신사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어 보여준다. 꽤 두툼한 서류봉투.
"아, 이 가방에는 뭐 이런 것들 밖에 없어. 자산관리사가 보내준 서류들. 내가 나이가 들어서 눈도 침침하고 머리도 조금 굳었지만 이런 것들은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거든."
자산관리사? 자산이 얼마가 있길래 자산관리사를 따로 두는 거지. 그건 부자들만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지금 채권, 달러, 주식, 금, 은등 모든 것에 투자를 하고 있다네. 내 자산운용사가 내 취향을 알고 이렇게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서 온 거야. 자네도 주식 같은 거 하나?"
갑자기 재테크 얘기라니. 재테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얼마 전 주식으로 큰돈을 벌기는 했다.
HLB 주식으로 투자금의 4배는 벌었으니까!
"그럼요. 얼마 전에 제약/바이오 주식으로 4배 벌고 모두 매도했는걸요. 어르신은 어떤 주식에 투자하세요?"
노신사가 본인의 자산운용보고서를 보여주며 이야기한다. 이 어르신도 주식 얘기에 꽤나 흥미를 보인다. 그러면서 내 새우깡 하나를 가져가 입에 넣는다.
"쩝쩝. 잘 했구만. 주식을 잘하나 보군. 나는 제약/바이오 주식은 가지고 있지 않아. 대부분 고배당주나 리츠 상품에 투자되고 있지. 여기 봐봐. 보면 다 재미없는 주식들이지?"
노신사의 자산운용보고서를 살펴본다.
'채권.. 금.. 은.. 달러.. 원자재.. 맥쿼리인프라.. 그리고 은행주들.. 진짜 다 재미없는 종목들 뿐이네. 이런 거 투자해서 뭐 하나.. 아.. 어르신이라 심장이 콩알만 하시겠구나.. 건강하셔야지.. 가만 보자.. 운용 금액이..'
‘운용 금액이…’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믿기지 않는다.
금융자산이 170억이나 된다고?
지금 내 옆에서 새우깡을 쩝쩝거리고 있는 이 노인네가 100억을 넘게 갖고 있다고? 튀어나온 눈알을 간신히 집어넣어 본다.
"헉. 어르신 엄청 부자시네요?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게 되신 거예요?"
"글쎄. 그냥 살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은데.. 남들보다 조금 더 일하고, 조금 더 생각하고, 조금 덜 쓰고 하다 보니.."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을 비법이라고 알려주다니. 뭔가 숨겨진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처음 본 젊은이한테는 알려주기 아까운 그런 방법.
「 잠시 후 우리 열차의 마지막 역인 서울역에 도착합니다. 내리실 때에는 두고 내리는 물건이 없도록.. 」
어색함과 신기함, 존경스러움과 의심이 가득한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서울역에 도착했다. 처음엔 조금 귀찮긴 했지만 뭔가 색다른 경험을 한 것 같다.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을 만난 기분.
"어르신, 오늘 감사했습니다. 살펴 가세요!"
노신사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악수를 청한다.
"감사하긴, 내가 정말 고맙지. 덕분에 대전역에서 KTX도 잘 타게 되었고 이렇게 심심하지 않게 서울까지 오게 되었잖나. 연락처라도 알려주겠나. 나중에 내가 밥 한 번 사고 싶은데.. 아참 이건 내 명함."
70대 남자에게 번호를 따여본 경험은 처음이다. 크게 내키진 않았지만 거절하는 것이 더 두려워 번호를 넘겨준다.
'설마 진짜 연락 오겠어.'
170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노신사와 헤어진다. 노신사의 모습이 저 멀리 희미해질 때까지 기다린 후 명함을 살펴본다.
(주) xxx
곧바로 네이버에 해당 기업을 검색해 본다.
검색 결과가 시원찮다.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명함에 있는 주소를 검색한 뒤 로드뷰를 살펴본다. 해당 건물에 명함 안에 적혀있는 회사가 없다.
뭐야 이거.
완전 사기꾼이잖아?
아 내 아까운 새우깡.
다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