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재.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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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갑자기 집을 보여줄 수 없다니요? 저는 오늘 저녁에 집을 보고 결정하는 조건으로 일단 가계약금을 입금한건데요."
부동산도 당황한 모양이다. 난처한 목소리로 매도자와 다시 통화 후 연락을 준다고 한다.
우리도 차 안에서 급하게 부부 회의를 개최한다. 현재 살고 있는 세입자가 집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계약은 없던 일로 하기로 결정한다.
띠리리리링-
부동산이다.
"아 네 북꿈씨, 매도인과 통화했는데요. 매도인은 이미 오전에 그쪽 세입자와 협의를 끝냈대요. 이사 비용을 500이나 요구하더래요; 결국 500 주고 만기 때 퇴거하는 걸로 이야기 끝냈답니다. 그런데.."
'그런데'라는 단어는 늘 찜찜하다. 똥을 중간에 끊어서 잔변이 남아있는 기분. 이제 막 휴게소에서 나왔는데 다시 배가 살살 아픈 것 같은 그런 찜찜함..
"그쪽 세입자가 매수인 분에게 집은 보여드릴 수 있지만 전세 세입자 구하는 것에는 협조할 수 없대요. 집에 사람 들락날락하는 게 싫다네요."
나는 집을 안 봐도 되지만,
집을 안 보고 전세 계약할 세입자는 없을테니까.
"계약 잠시 보류하시죠. 애초에 협의되었던 것과 말이 다르니 생각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대로 계약하긴 위험하다.
위험은 일단 피하고 보자.
처음 내 집 마련을 했던 그때처럼 오랜만에 와이프와 부동산 관련 주제로 긴 이야기를 나눴다.
현재까지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급매가 나옴. 호가와 실거래가보다 저렴.
2. 우리는 매수 후 전세를 세팅해야 하는 상황
3. 매수하는 집 현재 세입자 만기 12월
4. 현재 거주 중인 세입자는 우리에게 협조할 생각 X
5. 즉, 집을 안 보고 전세 계약할 세입자를 찾아야 함.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계약은 아닌 것 같다.
부동산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입장을 전달해 본다.
"아무래도 계약을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세상에 집을 안 보고 전세 계약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른 좋은 매물 나오면 연락 주세요.."
부동산에서도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 준다. 본인들도 함부로 밀고 나가기엔 리스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테니까.
며칠 뒤.
아침 일찍 부동산에서 문자 한 통이 온다.
「 북꿈씨, 저도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요.. 이 매매가면 아까운 것 같아요. 계약하세요. 제가 책임지고 전세 빼드릴게요. 지금 전세 매물이 별로 없기도 하구요. 어차피 집 구조는 다 똑같고 컨디션도 다 비슷해요. 다른 집 보여주고 계약 시킬 수 있어요. 」
아침 일찍 장문의 문자.
이런 건 와이프랑 연애할 때나 받아본 것 같은데.
부동산의 문자 안에는 문장 하나하나에 진심이 담겨있다. 아마 밤새 이 계약에 대해 고민을 한 모양이다.
사실 나도 지난밤, 앞으로 나올 전세 매물까지 대략적으로 파악해 봤다.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고.
나의 생각을 부동산에 전달해 본다.
할 말이 많으니 전화로.
"소장님 통화 괜찮으시죠? 저도 많이 생각해 봤어요. 집을 안 보고 계약할 세입자가 있을지. 그런데 정말 흔치 않다는 게 결론이에요. 저도 세입자 몇 번 들여봤지만 집을 안 보고 계약한 경우는 없었어요.
그런데 현재 세입자의 만기가 12월 말이잖아요? 조금 더 조율을 해서 11월이나 12월 초까지 이사 갈 집을 구해서 나가면 괜찮을 것 같아요. 매도자 분이 잔금 유예 조건은 1월 말까지 받아줬으니 현 세입자 퇴거하면 집 보여주면서 전세 세팅하면 될 것 같긴 해요."
부동산 소장님도 꼬여버린 끈을 하나 둘 풀어가는 느낌으로 나에게 이야기한다.
"맞아요. 북꿈씨는 나이도 어린데 지혜롭네요. 저도 최선의 노력을 할게요. 한 달 정도 안에 전세 못 빼면 저도 공동중개로 다 풀어버릴 거예요. 전세 구하러 오는 손님들에게는 집 안 보고 계약하면 수수료 안 받는다고 하려구요."
어딘가 모르게 듬직하다. 일단 계약을 성사시키는 것이 목적일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를 진심이 느껴진다.
"매도인이 잔금 유예 기간을 주긴 했지만 저는 현재 세입자 만기인 12월까지 다음 세입자를 구하는 게 목표에요. 내년 2월부터 대전 입주장 시작되잖아요? 제가 정해놓은 목표 금액 아래로 떨어지면 자금 사정이 여의치 못해요. 진짜 돈 없어요."
정해 놓은 전세 가격을 받지 못하면 잔금이 힘들다고 죽는소리도 해본다. 사실 현재 생각하는 전세가보다 전세가격이 5000만 원 떨어져도 잔금은 가능하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자금 계획은 늘 보수적으로 세우고 있다.
이야기를 들은 부동산 아주머니가 호탕하게 이야기한다.
"북꿈씨, 걱정 말아요. 만약 전세가격이 떨어져서 북꿈씨가 정한 전세가격 이하로 떨어지잖아요? 그럼 제가 그만큼 무이자로 돈 빌려줄게요. 저도 이 물건 놓치면 중개사로서 자존심 상해서 그래요."
평소 인상이 좋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불쌍해 보여서 그런 건지 여차하면 부동산에서 돈을 빌려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사금융을 쓸 생각이 없다.
다시 한번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1. 급매가 나옴. 호가와 실거래가보다 저렴.
2. 우리는 매수 후 전세를 세팅해야 하는 상황
3. 매수하는 집 현재 세입자 만기 12월
4. 현재 거주 중인 세입자는 우리에게 협조할 생각 X
5. 즉, 집을 안 보고 전세 계약할 세입자를 찾아야 함.
6. 매도인이 1월 말까지 잔금유예를 해줘서 현 세입자가 나가고도 한 달 반의 여유가 있음.
7. 중개인은 집 안 보고 계약하는 세입자에겐 수수료를 받지 않겠다는 메리트를 제공하기로 함.
8. 전세가격이 많이 떨어져서 돈이 부족해지면 중개인이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기로 약속.
나쁜 상황 속 나쁘지 않은 조건들이다. 악조건이지만 이상하게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좋습니다. 일단 저희도 집은 한 번 보고 결정할게요. 집 보고 맘에 안 들면 계약은 없던 걸로 하고, 맘에 들면 소장님 말씀대로 진행하시죠!"
드디어 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참.. 매수하면서 집 보는 것도 사정사정 해야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왠지 이상한 사람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집도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상태일 것 같고. 그러니까 집 보여주는 게 꺼려지는 게 아닐까.
고층까지 가는 엘리베이터도 처음 타본다.
느린 듯 느리지 않은 알쏭달쏭한 이 느낌.
부동산 소장님과 와이프, 그리고 나까지 모두 긴장한 채로 초인종을 누른다.
띵 동 -
아무 말 없이 현관문이 열리고,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집을 보기 시작한다.
어딘가 부티 나보이는 가구들,
먼지 한 톨 없는 집 안,
그리고 생각보다는 친절한 세입자 아줌마.
집에는 크게 하자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컨디션이 좋다.
와이프와 눈이 한 번 마주친다.
딱 보니 와이프도 마음에 드는 눈치다.
여차하면 우리가 들어와서 살 수도 있는 집이니까.
집을 나와 다시 부동산에 들어간다.
부동산 아주머니도, 나도 모두 할 말이 있는 눈치다.
안전지대라도 도착한 듯 부동산 문이 열리자마자 우리는 모두 같은 말을 뱉는다.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계약하게 되면 저 진짜 다른거 없이 소장님만 믿고 가는거에요. 제 물건 전세를 1등으로 빼주셔야 해요.."
부동산 소장님의 눈빛이 비장해진다. 명량 대첩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눈빛을 보는 것 같다.
"물론이죠. 집 보고 나서 더 자신감이 생겼어요."
결국 우리는 계약서 작성 날짜를 잡았다.
이제는 진짜 전세 세입자만 구하면 된다.
집을 안 보고 계약할 전세 세입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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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우리에게 또 다른 악재가 찾아온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