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는 우리 아이가 딸이었으면 좋겠어?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임신 사실을 확인한 후 아니, 어쩌면 연애할 때부터 심심찮게 나눴던 우리의 대화.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아들'에 대한 환상은 없었다. 여자아이를 보며 딸바보처럼 헤벌쭉 웃고 있는 나의 모습만 상상이 됐다. [사랑의 바보] 노래가 들려오면 첫사랑의 감정으로 딸아이를 상상하기도 했으니까.
와이프에게 겉으로는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어. 건강하기만 하면 돼'라고 이야기했지만 내심 속으로는 딸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작은 얼굴에 작은 코, 그리고 콩알만 한 눈을 가진..
와이프와 꼭 닮아있는 그런 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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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12주 차가 지난 시점.
와이프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해진다.
"여보 어디 아랍권이라도 다녀왔어? 아니면 족욕기에 코만 좀 담가놨어? 집에 벌이 있나? 벌에 쏘인 건가?"
와이프의 코가 조금씩 커지고 있다. 그녀의 코는 13년 만에 가장 큰 조수간만의 차를 보여주고 있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그녀의 코는 만조 상태가 되어 더욱 반짝이는 요즘이다.
잠깐. 코가 커지면..
아들이라던데...
산부인과 정기 검진일.
초음파 기계가 와이프 배 위에서 자유롭게 항해한다. 그러다 어느 좌표에서 기계가 뚝 멈춘다.
"성별 궁금하시죠? 여기 가랑이 사이에 뭐가 주렁주렁 달려있네요~~ 잘 안 보여 주는 아이들도 많은데 꿈이는 존재감을 확실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주렁주렁..
애한테 주렁주렁이라는 표현이 맞나.
허허. 어쨌든 이 녀석 참. 아빠 닮았군.
곧바로 와이프의 반응을 살펴본다.
규모 7.0 동공 지진.
와이프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진료실 밖에 나오자마자 와이프와 동시에 웃음이 터진다. 엄마 아빠가 성별 궁금해하는 건 어찌 알고 이렇게 존재감을 확 드러내주는지.
내가 아들 아빠라니.
와이프가 아들 엄마라니.
킥킥킥
아들 확진 판정 후 우리 부부는 일주일 간의 아들 적응 기간을 가졌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었는데 막상 아들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묘했을 것이다. 어느 한 쪽이 아쉬워지긴 하니까.
일주일 사이 플레이 리스트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큰 비중을 차지했던 [사랑의 바보]를 조용히 삭제하고 그 빈자리를 [전선을 간다]로 채웠다.
이제부터 꿈이와 나는 전우다.
와이프에게 같이 혼나고, 같이 쫓겨나게 될 전우.
"여보.. 아들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야?"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인 나에게 와이프가 묻는다.
평생 딸로만 살아왔던 와이프인데, 막상 아들 엄마가 되니 아들의 입장이 궁금한가 보다. 그런 와이프에게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해준다.
"세상의 전부지."
와이프가 조금 놀란다. 의외의 대답이었나 보다.
"응? 그렇게 이야기한 적 한 번도 없었잖아. 평소에 어머님 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한 적이 없었고.. 왜 다들 여자친구 생기거나 결혼하면 엄마는 나 몰라라 하는 거야?"
"그때부터는 여자친구나 와이프가 세상의 전부가 되니까."
와이프가 조금 슬픈 눈으로 따지듯 이야기한다.
"난 벌써부터 서운해. 나중에 결혼하면 이제 나는 뒷전이 되는 거잖아. 내 아들 며느리한테 뺏기는 거라고!"
"뺏어가긴 뭘 뺏어가.. 나는 내가 온 거지 여보가 뺏어온 게 아니야. 그리고 아들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거기에 올인한다는 것은 오히려 칭찬해 줘야 하지 않겠어? 나이 서른 돼서 엄마만 찾는다 생각해 봐.. 그게 더 답답하지 않겠어? 숫사자가 언제까지 무리에 머물러 있을 순 없잖아. 때가 되면 독립해서 자신만의 무리를 만들어야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과거 남아선호사상은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이제는 여아 선호 사상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아들을 낳으면 나중에 며느리에게 뺏기는 기분이 든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니까.
결혼하기 전,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엄마, 내가 효도는 어렸을 때 다 한 것 같으니 이제는 내 가정을 우선시하면서 살게. 연락 자주 못 해도 서운해하지 말아줘. 그만큼 잘 살고 있다는 거니까. 이해하지?"
엄마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나에게 이야기했다.
"당연하지. 네가 잘 사는 게 효도하는 거야. 단아한테도 전화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해. 나도 시어머니한테 전화 잘 안 했었어. 네 가정만 생각해. 나는 네가 우리 형편에 지금까지 바르게 자라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 그러니 효도할 생각하지 마 개썁색갸."
모든 남자의 첫사랑은 엄마다. 이 여자에게 어떻게 하면 예쁨 받을 수 있을까, 이 여자가 나 때문에 속상하면 안 될 텐데 하며 애를 쓴다.
그렇게 자신만을 바라보던 아들이 떠나간다. 이제 다른 여자가 더 좋다 하고 거기에 시간을 더 할애한다.
서운하겠지만 서운하게 느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역할은 그저 아들이 나중에 든든하게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 딱 거기까지다.
다시 돌아와 와이프에게 이야기한다.
"여보 많은 아들맘, 아들 아빠들이 아들은 키워봐야 소용이 없다며 미리 걱정하고 있잖아? 근데 걱정할 필요 없는 이야기 같아.
여보 지금 나랑 살아서 행복해 안 행복해?
재미있어 안 재미있어? 재밌고 행복하지?
내가 이렇게 사는 모습 보면서 우리 부모님도 엄청 행복해한다? 결국 내가 잘 사는 게 효도인 거야. 난 우리 꿈이가 나중에 정말 좋아하는 여자를 만났다고 하면 기특할 것 같아.
그리고 걱정하지 마. 어차피 여보 옆에 평생 붙어 있을 사람은 자식이 아니고 나야. 나는 새장가 갈 일 없어.. 여자는 너 하나로도 이미 너무 벅차..
그리고 제발 30년 뒤 얘기하지 말고.. 일단 잘 품고 잘 낳자.. 태어나면 그때부터 꿈이에게 좋은 멘토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에휴.
너는 벌써 며느리에게 자식 뺏길 일이 그렇게도 걱정이냐. 나는 당장 몇 개월 뒤부터 네 사랑이 가뭄에 콩 나듯 가끔 닿게 될 것이 걱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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