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X] 엘리베이터 도착음
외출 준비가 한창인 아침, 방 안은 어수선한 공기로 가득합니다. 오늘도 늦잠을 잤거든요. 헐레벌떡 일어나 씻고, 머리를 말리고, 어젯밤 챙겨둔 가방을 휙 들고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유리 현관을 나오자 ‘부르릉~’ ‘빵빵!!’ 하는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귀청을 울립니다. 집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 것은 행운이지만 대형 버스의 소음은, 어휴. 정말 요란하거든요. 게다가 오늘은 매미 떼도 한몫합니다.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뾰족한 바늘이 되어 귀 안을 콕콕 찌르네요. 안 되겠군요. 가방 안에 손을 넣어 휘적이며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찾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배터리가 0%에요. 이 떠들썩한 도시 서울에서 오늘 하루를 안전하게 보낼 수 있을까요?
[SFX] 버스가 정차하는 소리
버스를 타고 네 정류장 정도 이동하면 지하철역에 도착합니다. 출근 시간 버스 안은 이미 많은 사람으로 빼곡합니다. ‘이번 정류장은 OO역입니다.’ 지하철역에 금세 도착했어요.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갈아탑니다. 저기 지하철이 들어오네요. 지하철 문이 열리기 전 출입문 앞에 서 호흡을 깊이 내쉬며 생각합니다. ‘휴우~ 책을 읽자. 집중하면 좀 괜찮을지도!’ 지하철 안 소음은 제가 견디기 어려워하는 여러 소리들 중 하나입니다. 뭐, 저도 편하게 살고 싶은데 잘 안 돼요. 오늘은 지하철을 타고 약 30~40분 정도 이동할 거라 곧장 가방 안에서 책을 꺼냈습니다.
[AMBI] 지하철 운행 소리
데이먼 크루코프스키의 『다른 방식으로 듣기』. 오늘 읽을 책입니다. 크루코프스키는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갤럭시 500’의 멤버(1)입니다. 이 책은 크루코프스키가 팟캐스트로 방송한 것을 책으로 펴낸 겁니다. 시간, 공간, 사랑, 돈, 권력, 신호와 소음까지 모두 여섯 개 에피소드로 구성된 얇은 책입니다. 시간과 공간 사이에는 기술사학자 에밀리 톰프슨이 쓴 짧은 서평 비슷한 것도 포함됩니다.
디지털 기술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들을까요?
크루코프스키가 이 책에서 계속해서 묻는 질문입니다. 예컨대 첫 번째 에피소드 ‘시간’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포기하는 아날로그의 시간성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디지털 시간은 아날로그의 주관적이고 유연한 시간을 한치의 오차 없이 흐르는 시계 시간으로 고정시킵니다. 가령 ‘클릭 트랙’(2)은 아날로그 음반에서 자주 일어나던 빨라지는 템포의 “결함”을 바로잡아주지요. 그렇지만 디지털 시간의 문제는 ‘레이턴시’(3)를 피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아파트에서 월드컵 경기를 보다가 다른 집에서 먼저 들려오는 함성 소리로 우리 팀이 골을 넣었다는 사실을 스포당해 본 적 있나요? 페이스톡 연결 중 자꾸만 상대방의 목소리가 지연되는 일을 경험해 본 적 있나요? 모두 디지털 레이턴시의 일종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실시간 스트리밍’이 정말로 ‘실시간’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도시에는 공유되는 소리가 없다는 것 역시 디지털 시대의 독특한 현상 중 하나입니다. 거리 위 사람들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 있든 각자의 소리를 가집니다. 바깥 소리를 차단하고 개인의 소리로 사유화된 가상 공간을 만드는 겁니다. 본격적으로 외부 소리를 차단해보려는 건축물인 콘서트홀보다 헤드폰이나 이어폰이 더욱 비사회적인 것은 그 소리가 개인의 머리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없어서입니다. 우리는 듣기 싫은 소리를 제어하고, 심지어는 제거하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SFX] ‘삐빅. 경비가 해제되었습니다.’
오늘의 일터에 도착했습니다. 날이 많이 더워요.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 에어컨을 켭니다. 땀을 식히는 동안 컴퓨터를 작동시키고 한 켠에 놓여 있는 스피커 전원도 올려요. 정적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방해되지 않는 정도의 음악을 틀어두고 일합니다. 유튜브에 접속해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플레이리스트를 살피다 적당한 것을 하나 골라 클릭합니다.
[BED] 앰비언트 뮤직
스피커를 적절한 볼륨으로 맞추고 업무를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업무를 시작하기 전 연간 다이어리를 펼치는 것이 일이었다면, 지금 저는 공유 워크 스페이스 노션을 열고 오늘 할 일을 확인합니다. 여기에 모든 업무 시스템을 필요에 따라 직접 만듭니다. 개인 작업뿐만 아니라 협업도 무척 편리해요. 다른 공간에 있어도 같은 화면을 보고 회의를 진행하기에도 좋습니다. 내가 지금 컴퓨터 화면에 타이핑 하는 내용이 상대방의 화면에도 ‘실시간’으로 적용되니까요. 물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곳에서는 말짱 꽝이지만요. 그런 사소한 문제만 감수한다면, 디지털 기술이 일의 효율성에 가져다 준 효과는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SFX] 지하철 도착 안내음
퇴근입니다. 다시 지하철에 올라 『다른 방식으로 듣기』를 꺼냈어요. 크루코프스키의 문제제기는 공감 가는 면이 분명 있지만, 한편으로는 과거 아날로스 시대 소리를 미화하는 노스탤지어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듭니다. 크루코프스키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요? 조금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AMBI] 지하철 운행 소리
다섯 번째 에피소드 ‘권력’에서는 디지털 음원 기업 스포티파이(Spotify)가 음악 추천 알고리즘을 정교화해나간 과정을 살핍니다. 알고리즘 시스템은 사용자가 선호하는 음악을 탁월하게 추천해 줍니다. 처음 보는 아티스트지만, 재생을 눌러보면 영락 없이 마음에 드는 음악인 경우가 많아요. 어디선가 들어본 것처럼 익숙한 음악. 크루코프스키가 지적하는 지점은 바로 여깁니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음악은 익숙하지, ‘놀랍지는 않다’는 것이죠. 이어폰이 공공장소에서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게 한 것처럼, 알고리즘 시스템은 음악의 바다 속에서 우리의 음악 취향을 구역화합니다. 알고리즘 시스템 안에 머무는 한, 그 구역 밖에 어떤 음악이 존재하는지조차 알기 어려워요.
그러고 보면 좋아할 만한 음악만 추천하는 알고리즘 시스템은 디지털 기술이 소리를 처리하는 방식과 닮았습니다. 디지털 기술은 더 좋은 음질, 더 높은 전달력을 위해 신호음과 소음을 전략적으로 분리합니다.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각자의 소리 환경을 조작할 수 있을 뿐만 하니라, 그 소리 환경을 구성하는 소리는 깨끗하고 선명한 하이파이(high fidelity) 음질입니다. 잡음은 일체 제거되죠.
[SFX] 지하철 출입문 개폐음. “왼쪽 문이 열립니다”
책을 덮어 가방 안에 넣고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나와 걷습니다. 책의 끄트머리에서 크루코프스키가 지나가듯 무심하게 껴넣은 한 문장이 머릿속에서 욍욍댑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진정한 차이는 소음으로 풍요로운 세상과 오로지 신호만을 얻으려 애쓰는 세상 사이에 있다”고요(133). 이 말을 꼽씹다 갑자기 소름이 끼쳤습니다.
[SFX] 도시 거리의 소음 (자동차 경적 소리, 어린 아이들이 뛰어 노는 소리)
‘노키즈존,’ ‘급식충,’ ‘여혐,’ ‘이대남,’ ‘젊꼰,’ ‘틀딱’ 같은 수많은 혐오 표현은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양극화 시대라는 점을 증명합니다. 혐오로 점철된 이 시대는 원하지 않는 모든 소리를 소거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려주도록 발전해 온 디지털 기술과 닮았습니다. 이질적이거나 불편한 것을 모조리 제거하고 동질적인 것만으로 형성한 개개인의 작은 세계에는 신호음 외 작은 소음 하나 끼어들 틈 없이 최고급 음질을 자랑하는 디지털 세계의 작동원리가 새겨져 있는 겁니다.
이어폰 배터리를 충전해두지 못한 그날 오전.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귀를 찌르는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크루코프스키 식으로 말하자면, 소음이던 매미 소리를 신호음으로 바꾸어 본 것이죠. 그랬더니 재미있는 일이 펼쳐졌습니다.
[SFX] 매미 떼 울음 소리
숲속 한복판에 들어선 듯 ‘솨아아-’ 떼지어 우는 매미 소리는 어느 순간 스피커의 볼륨 한 칸을 내린 것처럼 탁 하고 줄어들더니 또 한 칸, 다시 한 칸 잦아들면서 이내 주변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러자 매미 소리에 가려져 있던 다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주 멀리서 울고 있는 또 다른 매미 그룹, 그 배경음 위에서 홀로 ‘매앰 매앰-’하고 우는 한 마리의 매미 소리와 자전거 경적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그러더니 다시 저 멀리서부터 매미 울음 소리가 차츰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한 단계, 또 한 단계, 다시 또 한 단계 음량을 높이더니 처음과 같이 떼지어 우는 소리가 되었네요.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소리의 강도가 점차적으로 약해졌다가 나름의 즉흥적인 솔로 구간을 지나 소리의 강도와 밀도가 점차 다시 높아져가는 그 과정이요.
‘흥미롭네’ 정도의 감상을 남기고 금방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태풍 소식으로 시끄럽던 몇 주 전, 문득 매미의 안녕이 궁금해졌습니다. 바깥은 매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고요했습니다. ‘그 많던 매미는 다 어디로 갔을까?’ 그때 알았습니다. 소리를 듣는 것은 그 소리와 친해지는 일이라는 것을요. 어떤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 소리와 관계 맺고, 몰랐던 세계를 만나고, 그렇게 좁았던 나의 세계가 조금씩 확장되는 일이라는 것을요.
크루코프스키가 아날로그 시대의 소리를 그리워 하는 건 그저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닙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듣고 싶지 않은 것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나와 다른 것들을 흡수하죠. 불편한 것과 부딪히면서 각자의 뾰족한 모서리를 함께 맞추어 갑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은 그 어려움을 매우 손쉽게 해결해줍니다. 원하지 않으면 ‘제거’하면 되니까요.
디지털 기술 시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넓은 세상을 수월하게 만나는 한편 각자의 세계를 비좁게 한정하기도 합니다. 다른 것은 결코 침범하지 못할 빈틈없는 경계를 세웁니다. 제가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외부 소음을 ‘제거’한 것처럼요.
편리한 이 기술 시대에 애써 불편을 감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여전히 전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이 없이 생활하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이어폰을 귀에 꽂는 간단한 행위만으로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차단하는 습관이 나의 세계에 다른 무엇도 침범하기 어려운 철옹성 같은 벽을 쌓을지 모른다는 사실은 섬뜩합니다. 기술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나요? 기술이 감추는 건 무엇일까요? 거기 새겨진 욕망은 또 무엇이고, 그것은 여러분 삶의 태도와 습관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요?
[팟캐스트 용어] 이언 코스
SFX (’sound effect’[음향효과]의 줄임말) 이야기의 내용과 관련된 오디오 샘플로 전경에 배치되어 선명하게 들린다. 로케이션에서 녹음하거나, 기존 오디오 라이브러리에서 가져오거나, 스튜디오에서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AMBI (’ambience’[주변음향]의 줄임말) 현장감을 조성하는 오디오. ‘Nat[ural] sound’(자연 음향)라고도 한다.
BED 계속되거나 움직이는 느낌을 위해 목소리 아래에 깔리는 오디오. 보통은 음악을 가리키지만 현장 녹음이나 기타 주변 음향이 될 수도 있다.
『다른 방식으로 듣기』, 134.
(1) 지금은 ‘데이먼 앤 나오미’로 활동.
(2) 메트로놈이 녹음된 트랙. 디지털 녹음 현장에서 연주자는 클릭 트랙에 맞추어 연주가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문제를 해결한다.
(3) latency. 컴퓨터가 신호를 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 의해 발생하는 디지털 통신 지연 현상(14).
46호_VIEW 2023.08.31.
글 ∙ 에디터S
책임편집
씨샵레터 구독하기
만드는 사람들
정경영 계희승 강지영 권현석 김경화 정이은
에디터S 소록
#VIEW #기술 #다른방식으로듣기 #듣기 #디지털 #매체 #문화 #씨샵레터 #에디터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