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여유 시간이 생겼다. 다음 달 독서 모임에서 다룰 책 한 권 달랑 가방에 넣고 근처 카페를 찾았다.
늦은 점심시간 이후의 시간은 왠지 더디게 가는 느낌이다. 열어 놓은 카페 커다란 창 너머 하늘의 구름은 멈춰있는 듯 보이고, 살랑이는 가을바람에 길가 나뭇잎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오래된 영화 테이프가 천천히 돌아가는 속에 들어간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
주문한 커피와 빵이 담긴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가방에서 꺼내 놓았던 책을 들었다.
어머나! 가로수에 붙어있던 작은 송충이가 바람에 날려 열린 창문을 넘어 테이블 위로 떨어졌는지, 책 표지 위에서 분주하게 기어가는 게 보였다. 예전 같으면 소리치며 송충이가 붙은 책을 멀리 던졌을 게 분명하다.
허나 이젠 그런 호들갑도 괜한 에너지 낭비라 생각되어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았다가 검지로 가볍게 튕겨버렸다.
긴 나무 테이블 끝에 떨어진 송충이는 잠시 기절한 듯 움직이지 않더니 어느새 또 급하게 꿈틀거리며 맹렬한 기세로 내 앞의 테이블 쪽으로 기어 왔다. 마치 '그 자리는 내가 먼저 앉았던 곳이요!'라고 항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커피 쟁반을 들어 조금 더 옆으로 옮겨 두고 빵 옆에 놓인 냅킨을 집어 담배 말듯 돌돌 말아 송충이를 밀어냈다. 인간의 거대한(송충이에겐 그렇게 느껴졌을 거다) 무기에 송충이가 힘없이 한 바퀴 떼굴 구르더니 이내 또 달린다.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몸이 꽤 날렵하다.
한가한 카페 안, 온통 빈 테이블을 놔두고 송충이와 때아닌 자리 쟁탈전을 벌이느라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엄마가 한 말이 생각났다.
설거지 후 나름 소독이라면 소독한다는 마음으로 개수대 안으로 끓인 물을 들이붓는 내 팔을 엄마가 황급히 잡았다.
"얘는~! 뜨거운 물을 그렇게 막 버리면 어떡하니?"
"왜 그래 엄마? 이렇게라도 해야 세균이 죽지."
"거기도 사는 것들이 있을 텐데..."
"그니까 그런 벌레들 죽으라고."
"그것들도 다 살자고 세상에 나왔을 텐데 제 명까진 살게 둬야지. 그렇게 죽이면 쓰냐!"
"이래서 죽으면 그게 제 명까지 사는 거지 뭐."
"안 보이는 건 몰라도 발 달린 것들은 도망이라도 가게 시간을 줘야지. 그렇게 막 끓는 물 들이붓고 그러지 마라."
엄마는 이미 저질러놓은 일이니 다음엔 그러지 말라면서 내게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어느 날 저녁 일이다.
그날 이후 나는 싱크대 사용 후 뜨거운 물을 버릴 때마다 엄마처럼, 미리 싱크대 주변을 노크하듯 두드리고 잠시 기다렸다 물을 흘려 붓는다.
'그것들도 다 살자고 세상에 나왔을 텐데..'라고 하던 엄마의 말이 소독한답시고 뜨거운 물을 마구 흘려보내곤 하던 나의 팔을 잡아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마다 다 의미가 있다. 나는 나대로 다른 이는 다른 이대로,
그런데 그 의미 있음이 어찌 인간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했는지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은 엄마의 배움은 거기서 멈췄다. 그나마도 일제 강점기여서 초등학교는 일본인 선생의 수업을 제대로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가끔 엄마는 "조금 늦게 해방되었으면 일본어라도 배워 써먹을 수 있었을 텐데, 해방되고 전쟁통에 이도저도 아니게 됐지 뭐냐." 하면서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들이 들으면 가슴 아플 말을 하기도 했다.
요즘 말로 '가방끈'이 짧은 엄마는 교과서로 못 배운 것을 자신이 몸소 체험을 하며 삶의 이치를 터득한 듯하다. 지식이 많다고 지혜로운 게 아닌 것과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든 제 명까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래 너는 너대로 네 길을 가라. 나는 다른 자리로 가겠다. 이 넓은 공간을 두고 굳이 너와 자리 다툼하지 않으련다. 밀어내도 기필코 내 가까이로 기어 오는 송충이를 향해 나는 속으로 말하며 주섬주섬 내 짐을 챙겼다.
'우리 엄마 덕인 줄 알아. 안 그럼 넌 벌써 죽었어.'
이런 걸 공존이라고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