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연휴가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길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지루하다고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갈 수도 없고, 책장에 먼지 쓰고 옴짝 달 삭 못하고 선 책들을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손을 댔다.
우선 책장 앞 작은 서랍을 열었다. 머리핀이며, 옷핀, 옷을 사고 받은 여분의 단추들이 섞여 있는 사랍 안에서 오래된 USB가 눈에 띄었다. 아직 쓸 만은 한지 궁금해서 책장 정리하려던 생각은 잊어버리고 노트북을 켜고 USB를 꼽았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서 보물을 숨겨 놓은 동굴의 문이 열린 것처럼 오래전에 내가 썼던 글이 USB안에서 개미가 기어 나오듯 줄줄이 올라와 모니터를 빼곡하게 채웠다.
‘가만있자... 누구한테 줄까?’ 빠져나갈 듯 아픈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주무르며 눈앞의 노란 빵조각을 바라보며 생각하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엄마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날아갈 듯하다. ‘마약을 하면 이런 기분일까?’
지금 이 기분과 비교하고 싶은 마음을 떠올린 게 하필 ‘마약’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나는 지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다.
요즘 TV방송을 보면 음식 만드는 프로그램이 유독 많다. 스타(?) 셰프들의 현란한 손놀림에 놀라기도 하고, 일반인들이 자신만의 레시피로 만든 요리를 가지고 나와 솜씨를 뽐내는 것을 볼 때마다 요리에 젬병인 나는 그저 감탄하고 부러울 뿐이다.
‘딸은 엄마를 닮는다.’고 하던데 나는 아닌가 보다. 적어도 음식솜씨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러다 보니 요리와는 점점 담을 쌓고, 아직도 친정엄마가 만들어 주는 김치와 반찬으로 아쉬움 없이 산다. 간혹 밖에서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있으면 나는 설거지를 자처한다.
요리를 잘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팔 걷어붙이고 달려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어느 날 요리프로그램도 아닌 건강에 관한 프로그램 중에 ‘다이어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귀를 쫑긋 세우고 듣다가, 다이어트할 때 공복 해소도 되고,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다는 ‘호박 고구마 빵’ 만드는 법에 관심이 생겼다. 가만히 들어보니 요리에 소질이 없는 나도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따라 해 봤다.
다른 것은 다 제치고 나를 홀딱 빠지게 만든 것은 ‘머랭 치기’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그냥 넓은 그릇에 달걀흰자를 풀고 거품기로 휘젓기 시작했다. ‘달걀흰자 거품을 내려면 한 방향으로만 저어야 한다.’는 초등학교 '가정' 시간에 배운 기억을 소환해 휘젓는 팔이 보일세라 정말 열심히 저었다.
반신반의하며 거품기를 돌리던 팔이 조금씩 아파오기 시작하면서 약간 노르스름한 빛깔의 액체였던 달걀 흰자위에서 서서히 거품이 보였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몰입하던 것의 결과물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 그동안의 고통은 모두 잊고 더욱 미친 듯이 그 일에 빠져든다. ‘머랭 치기’가 나에게는 그랬다.
작은 방울들이 하나하나 모이고 부드러운 구름처럼 변해가며 금방이라도 사르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거품 덩어리는 보기만 해도 달콤했다.
극심한 어깨 통증을 느꼈지만 새하얀 거품 덩어리를 내가 직접 만들었다는 뿌듯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후로 시간만 나면 ‘달걀 고구마 빵’을 만들기 위해 주방을 서성인다. 고구마 빵을 먹고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머랭 치기’에 빠진 것이다. 아마도 ‘내 노력의 결과물’이 단시간에 눈앞에 나타나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함이 아닌가 한다. 물론 팔과 어깨가 아파 미칠 지경이지만 수동 거품기를 고수하겠다.
왜냐하면 고통 뒤에 오는 달콤함의 유혹을 물리치기가 힘들기 때문이며, 삶의 순간에 닥치는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분명 고통을 잊고도 남을 달콤한 무엇이 내게로 온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인생의 고통 뒤에 오는 그 무엇은 ‘머랭 치기’로 얻은 거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신비롭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고통의 시간과 행복의 크기는 비례한다고 생각하니까.
생전 처음 ‘내가 만든 빵’을 가지고 엄마한테 가는 길. 가슴이 두근두근 걸음이 빨라진다.
♣ 머랭 치기
자동 거품기도 좋지만 수동 거품기를 권하고 싶다. 그래야 정말 내가 만드는 뿌듯함과 신기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거품기를 휘젓는 10분 동안 아픈 팔에 집중하지 말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시간도 빨리 가고 아픈 것도 잊게 된다. 노래를 두 곡 정도 듣다 보면 새하얗게 부풀어 오른 신비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 ‘이 어려운 걸 내가!’ 하는 대견함이 가슴속에 차오른다.
거의 10년 전쯤에 썼던 글인 것 같다. 그 당시 시간만 나면 거품기를 들고 주방에서 서성이던 때가 생각나 웃음이 난다.
그런데, 팔이 빠지도록 거품기를 휘저어 만든 구름 같은 하얀 크림을 얹은 '호박 고구마 빵'을 엄마는 맛나게 드셨을까? 당연히 맛있다고 모두 드셨을 거다. 엄만 빵보다 나의 수고에 더 큰 맛 점수를 줬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