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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원 Dec 13. 2023

엄마가 치매라서 다행이야!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위로가 되는 요즘이다.

요양원에 가기 전에도 엄마는 아주 오래전 일이 아니면 금방 잊어버리곤 했는데 이제는 아예 기억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듯하다. 아니 기억하곤 싶으나 기억의 회로가 낡아 전달이 잘 안 되는 것이겠지.

덕분에 엄마가 들어서 안 좋은 소식은 언젠가부터 전하지 않게 됐다. 물론 전하지 못한 말은 엄마를 볼 때마다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가슴을 짓누르지만, 엄마는 계속 모르길 바란다.



삶과 죽음의 길이 여기에 있으매 두려워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떨어지는 잎처럼

같은 나뭇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아 극락에서 만날 날을 나는 도 닦으며 기다리련다.


국민학교 국사 시간인지, 국어 시간이었는지, 몇 학년 때 배웠던 건지 기억도 없는 내가, 기억하는'제망매가'의 한 구절처럼, 삼 년 전 남동생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십 년 넘는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다 주렁주렁 매달린 주사약 병들을 팔에 달고, 몸 안의 수분이 모두 증발한 미라처럼 해골에 가죽을 덮어놓은 모습으로 인사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떠난, 동생 3주기에 혼자 동생이 잠든 추모공원을 찾았다.


가족들은 기일인 전날 다녀갔고, 나는 주말을 이용해 조용히 찾아갔다. 초겨울답게 제법 쌀쌀한 날씨에 부슬비까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어서 주차장에 주차 후, 실내로 이동하면서 '아우가 많이 춥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골함 양 옆으로 생전의 동생과 올케, 그리고 어린 조카가 함께 찍은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이제부터 겨울 시작이라 춥다. 거긴 춥지 않냐?'

'어딘지 모르지만 여기서처럼 아프진 마라'

듣는지 못 듣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그 자리에 선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 나인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와 여섯 살 차이 나는 막내 동생은 엄마가 일을 가면 봐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업고 학교에 가기도 했었다. 어느 때는 동생을 업고 다니는 게 싫어서 엄마가 오면  동생을 내동댕이 치다시피 던져주기도 했다.

지금은 젖먹이를 떼어놓고 일을 가던 엄마 마음이 어땠을지 충분히 알고도 남지만 그때는 나도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일 뿐이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더 많이 업어주기나 할걸'

소용없이 늦어버린 후회를 환하게 웃는 사진 속 동생에게 하는 데 뒤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막내 동생의 친구 다섯 명이 나를 에워싸고 병풍처럼 내 등뒤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었다.


"어머! 너희들..."

다음 말은 눈물이 먼저 입술을 적셔서 미처 나오지 못했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보이는 동생 친구들을 보자 참았던 눈물이 대책 없이 쏟아졌다. 

'이 아이도 살았으면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같이 늙어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과 친구의 기일을 잊지 않고 일부러 시간을 맞춰서 함께 동생을 찾아준 그들의 뜨거운 우정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코를 풀어가며 우는 나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는 친구들에게 나가 있겠다는 말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낙엽과 오가는 사람들에게 밟혀 땅바닥에 착 달라붙은 낙엽 위로 안개처럼 내려앉는 부슬비롤  멍하니 보다가 '이렇게 가슴 아픈 상황을 엄마가 몰라서 다행이다'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형제의 정도 끈끈하지만 부모자식 간의 정을 무엇에 견줄 수 있을까? 만약 엄마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아픈 것보다 더한 아픔을 느꼈으리라. 엄마가 요양원에 계시다는 게, 엄마가 치매라서 동생의 죽음을 모르고 지낸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나의 심정보다 곱절은 더할 아픔을 엄마가 겪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누님, 저희 그만 가보겠습니다. 어머님은 좀 어떠세요?"

밖으로 나온 동생 친구들이 엄마 안부까지 묻는다.

"엄마는 얼마 전에 요양원으로 모셨어. 거동이 불편한 거 빼면 괜찮아."

"저희도 언제 어머니 한 번 뵈러 가야 하는데..."

"바쁜데 이렇게 와 준 것만도 고맙다. 내년에도 와 줄거지?"

"그럼요 당연하죠."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보니까 내 동생이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마워."

"누님도 건강하시고 다음에 또 봬요."

"그러자  너희도 건강하게 잘 지내다 또 보자. 나는 좀 더 있다가 갈게"



'칼바람 부는 겨울이 와도 너는 춥지 않겠다. 친구들의 뜨거운 우정이 있어서. 너도 잘 지내'

'엄마는 아직도 네가 병원에 있는 줄 알아. 그니까 꿈에라도 온다면 좋은 모습으로 다녀가라.'

'뭐가 그리 급해서 엄마를 두고 먼저 갔누?'

인사를 하고도 동생 사진을 보고 속엣말을 중얼거리며 한참을 머물다 밖으로 나왔다.

멀리 주차장에서 동생 친구 다섯 명이 아쉬운 듯 추모공원 너머 먼 하늘을 보며 모여 서 있다가 밖으로 나오는 나를 보자 황급히 차에 타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내가 자신들을 보고 동생 생각으로 또 눈물을 흘릴까 걱정되어 빨리 자리를 뜨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못 본 척 다른 곳을 보면서 천천히 걸었다.


동생 장례를 치르는 삼일 동안 의견이 분분했었던 게 생각났다. 친지들 몇몇은 엄마에게 알려야 한다고 했고, 가뜩이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엄마에게 아들의 죽음을 알리면 더 큰일 날 테니 알리지 말라는 이웃분들 사이에서 여동생과 나도 어찌할 줄 몰라 난감했었다.

그런데 만약, 나의 자식 중 누군가 먼저 내 곁을 떠난다면 나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못 견딜 것 같았다. 함께 가겠다고 울며불며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 것이란 생각에 나와 동생은 엄마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 아픈데 어떻게 엄마에게 말할 수 있을까.


엄마는 이미 너무 많이 아팠다. 동생이 아팠던 긴 시긴을 엄마도 함께 아팠으니까. 겉으로 내색하지 못하는 슬픔의 눈물이 엄마 마음속에선 이미 바다를 이루고도 남았을 테니까.

낮엔 엄마를 주간보호 센터에 보내고, 저녁엔 조카들이 번갈아 집으로 가서 엄마와 밤을 보내는 사이 우리는 빠르고 조용히 동생을 보내줬다.


엄마는 아직도 막내 동생이 병원에 있는 줄 안다. 가끔 "막내는 괜찮냐? 에구 내가 힘이 조금 있으면 가서 볼 텐데... 자식이 아프다는데 얼굴 보러도 못 가고.. " 하면서 자신의 약한 몸을 원망한다.

어쩌면 엄마의 식사량이 는 것도 약한 자신의 체력을 위해서인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힘이 생기면 아들 보러 갈 생각으로. 

언젠가는 엄마도 동생을 만나겠지만 지금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커서 그냥 동생이 계속 병원에 있는 것으로 엄마가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엄마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평안할 테니까.

다른 사람들에겐 어떤지 모르지만, 엄마에겐 모르는 게 약인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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