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도 안다. 이 사람이 나에게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를.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그 찰나의 순간에 상대의 애정을 읽는다. 매주 토요일에는 어린이실에서 일하는데 토요일마다 어린이실로 배정받은 이유가 있다. 주말에는 여기가 도서관인지 유치원인지 모를 정도로 어린이들이 많이 온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부터 직접 책을 찾아 읽는 초등학생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안내데스크에 앉아 있으면 꼭 일부러 나의 앞에 와서 기웃거리는 아이들이 있다. 큰 볼일이 없는데도 괜히 책상 위를 쓰다듬는다던가, 책상 위에 붙어있는 안내문을 읽어보기도 한다. 그럼 나는 그냥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싱긋하고 웃어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모님 옆으로 와다다 도망가 버린다. 엄마 손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한번 봤다가, 다시 엄마를 봤다가 한다.
특히 동화책 코너는 신발을 벗고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아이들이 더 많다. 한마디로 우글우글하다. 아이들이 많다는 건 그만큼 정리해야 할 책도 많다는 뜻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신발을 벗고 우글우글한 아이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책을 제자리에 꽂는다. 집에 가고 싶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 옆에 와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이들. 그럼 나도 똑같이 빤히- 쳐다본다. 나도 그런 아이들이 싫지 않아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들을 괜히 모른 척한다. 귀엽다고 말을 걸면 도망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얼굴이 동그란 아이, 콧물을 흘리는 아이, 핑크색 왕 핀을 꽂은 아이, 우다다 달려가는 아이, 다소곳하게 앉아서 책을 읽는 아이, 엄마 옆에서 자는 아이,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 표정을 짓는 아이, 머리숱이 많은 아이…. 별의 별 아이들을 하루 종일 보다 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입 큰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된다. 나를 제외한 사람 중에 어린 시절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상상하는 입 큰 애의 어린 시절은 조금 맹한 표정에 콧구멍 한쪽에서는 콧물이 나오고 있다. 입 큰 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항상 이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한동안 내 방 벽면에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입 큰애가 보라색 옷을 입고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는, 웃거나 울기 직전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걸어둬서 그런 건지, 혹은 입 큰 애가 어렸을 때 항상 콧물을 흘려서 엄마에게 자주 혼났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아마 둘 중 하나이거나 둘 다 이유일 것이다. 입 큰 애는 지금도 순하지만 어릴 때는 더 순해서 형이 자기를 괴롭혀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맞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화가 나면 차마 형에게 대들지는 못하고 벽을 쿵쿵하고 때렸다고. 지금보다 훨씬 작은, 나보다도 작은 입 큰 애가 화가 나서 발개진 얼굴로 벽을 때리는 모습을 상상하면 웃기는 동시에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작고 통통한 손이 너무 아플 것 같다. 사랑하는 이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일은 무언가 웃기고 귀여운 동시에 마음이 먹먹해지는 일이다. 내가 지나온 시간을 입 큰 애도 똑같이 지나왔다고 생각하면 그 시간을 지나서 내 옆에 있는 입 큰애가 막 대견해진다. 당장이라도 입 큰 애를 안아주고 싶어진다. 나보다 훨씬 큰 입 큰 애가 나보다도 작았던 시절이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약해지게 만든다. 입 큰애가 나를 화나게 해도 한 번쯤은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내가 화가 났을 때 입 큰 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면 말이다.
이곳에는 책도, 아이들도 많지만, 아이들 옆에서 졸린 눈을 한 부모님들도 많다. 토요일 아침 9시 정각부터 도서관에 들이닥치는 아이들을 보며 정말 경이롭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경이로움의 대상은 아이들에서 부모님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혼자서 도서관에 올 수 없다. 반드시 옆에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침 9시부터 아이들이 도서관에 왔다는 건 그 아이들의 부모님들도 아침 일찍 일어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도서관에 왔다는 말이다. 그것도 황금 같은 토요일 아침에. 학부모들은 아이 옆에서 졸린 눈을 하고 책을 읽어주거나 옆에서 같이 책을 읽는다. 간혹가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학부모도 많다. 그런 학부모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나도 언젠가는 학부모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침 9시부터 아이들을 도서관에 데리고 오는 부지런한 학부모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아직은 학부모가 되고 싶다. 그리고 입 큰애가 학부모 중 '부'를 맡아준다면 든든할 것 같다. 아이들은 부와 모중 부를 더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 모는 예민하고 체력도 약해서 아이들을 마음껏 놀아주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부는 무던하고 체력도 좋아서 아이들을 잘 놀아 줄 것이다. 입 큰 애가 콧물 흘리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갑자기 아이들 콧물을 닦아주는 상상을 하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콧물을 흘리는 사람에서 이제는 콧물이 흘러도 스스로 닦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언젠가는 다른 아이의 콧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될 입 큰애와 나와 우리. 그 사이의 시간을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지금까지 산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그 시간 속에 입 큰 애가 옆에 있다면 살 만하지 않을까.
나도 입 큰애도 콧물을 흘리는 사람이었음을. 또 언젠가는 콧물 흘리는 아이들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사람이 될 것임을 기억하며 아이들과 학부모를 바라본다.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여기에 있다. 어린이와 학부모 그 사이 어디쯤 있는 우리가 어리게도 느껴졌다가 어른처럼 느껴졌다가 한다. 그 사이에 있는 동안 아이들에게도 학부모에게도 친절한 사람이고 싶다. 입 큰애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다 보면 나는 조금 더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