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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사 Jun 05. 2023

상처가 상처로 남지 않으려면


  너무나 아픈 상처를 받은 당신! 

화나고, 억울하고, 괴로우신가요?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오히려 사과받을 사람은 나야?’ 하면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당신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 보세요. 창밖으로, 아니면 저 하늘로, 그것도 안 되는 상황이라면 모니터의 아름다운 배경 화면이라도 보세요. 





시선을 옮겼다면 동시에 크게 숨쉬기를 단 5분 만이라도 유지하세요. 그러면 치밀어 올랐던 그 ‘열받음’이 조금은 누그러질 것입니다. 그 순간 ‘용서’라는 단어를 찬찬히 떠올려 보세요.   


  팀켈러의 『용서를 배우다』에는 용서를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용서가 실종된 이 시대에 “이제 용서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시간”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용서’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신(神)만이 할 수 있다고 ‘용서’에 들어가는 문조차 막고 있습니다. 지금은 용서보다는 분노가, 화해보다는 분열이 더 큰 힘을 얻고 있는 세상입니다.   

   

  제 친구의 경우가 생각납니다. 그녀가 대학 졸업 후 만난 남자는 첫 직장 상사였습니다. 그 후 그 남자는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옆에 있게 되었지요. 

  당시 그녀는 오만하게도 그 남자를 지금보다 더 멋지게 만들 거라는 되지도 않는 생각을 했습니다. 콩깍지가 씌었는지 그 남자의 장점만 보았어요. 데이트할 때 늦거나 며칠씩 잠적하는 것은 영혼이 자유로워서 그런다고 착각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그 남자의 모습에 허상을 본 듯합니다. 그 열정은 아주 짧고, 자주 오지 않았어요. 그랬음에도 그녀는 그 남자가 한 집안의 가장이 되면 달라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감행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가혹한 현실은 빨리 왔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일하는 것을 아예 잃어버릴 정도로 쉬는 날이 많았습니다. 아이랑 동동거리며 그 세월을 살아내는 동안 그 남자는 가정 경제에 관해서는 그저 손님이었습니다.

  삶이 힘겨울 때마다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답니다.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라고 말하자 “네 생각이 그렇다면 내가 나가 주마”하면서 그 남자는 가버렸답니다. 




그녀가 원한 대답은 그게 아니었지요. “우리 함께 노력해서 이 상황을 헤쳐 나가 보자”라든가 아니면 “앞으로 잘해보겠다”라는 답을 듣고 싶었겠지요. 노력조차 없이 나간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용서는 결단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게 고통을 준 상대를 생각하면 마음속에서 분노와 원망이 수도 없이 끓어오릅니다. 내게 상처를 준 그 몹쓸 사람이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지요. 평범했던 나를 악마로 만들기도 하는 건 용서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 상처를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의 소용돌이에서 빨리 벗어나야만 합니다. 먼저 내 마음을 열어봅니다. 절대 그러고 싶지 않겠지만, 상대방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상대의 입장과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용서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거친다면 원망과 비난하는 감정이 천천히 조금씩 사라질 것입니다.  

   


  


  물론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고 바로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아이들 아빠를 용서하는 데는 15년이나 걸렸습니다. 

  아이들이 무사히 성인이 되고, 그녀의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30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그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났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답니다. 

  그만큼 용서는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상처가 더 이상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아야만 용서가 가능합니다. 세월을 견뎌내고 성숙해진 다음에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사람들이 해야만 하는 위대한 과제입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그녀의 아들이 문제를 일으켜 아빠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조차도 그 남자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그렇게 크는 것이다. 잘 될 거다”라며 아이를 만나주지 않았답니다. 그때는 ‘저 사람이 애 아빠 맞아?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아이와 그녀는 더 단단해졌지요. 





  자신의 삶은 스스로 꾸려나가야 하는 거고, 세상 어디에도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살아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오히려 아이와 그녀가 한 뼘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녀가 남편을 용서하게 된 것은 아이 아빠이기도 하지만 세상에 맞서 살아내도록 이끈 사람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닿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용서를 할 수 있는 때가 되고, 용서할 만한 그릇이 된다면 그때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만일 지금까지도 그녀가 남편을, 아이가 아빠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면 그들은 피폐한 삶을 살았겠지요.  




  이처럼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의식적이고도 의지적인 선택입니다. 용서는 상처에서 비롯된 분노와 원망의 늪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용서는 인간을 한층 더 성장하고 성숙하게 합니다. 용서는 그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그 가치를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노력하고 시도해야만 합니다. 잊지 마세요. 용서는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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