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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성 Apr 17. 2024

[영화 속 미술] 영화 <키메라> 리뷰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괴물





  영화 <키메라>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르투(조쉬 오코너)가 그의 도굴꾼 친구들과 함께 ‘잃어버린 여인’을 찾는 여정을 담은 영화이다. 


  아르투에게는 땅 속의 유물을 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는 영화 전반에 걸쳐 무언가를 찾는다. 영화는 출소한 아르투가 ‘집’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되고, 그는 도굴꾼 동료들과 ‘유물’을 찾기 위해 고대의 무덤들을 파헤친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관객은 그가 결과적으로 찾고 있는 것이 오랜 연인 베니아미나(일 비아넬로)인 것을 깨닫는다. 소작농 위치에서 벗어나거나 모험을 꿈꾸는 동료들과 다르게 아르투는 "큰 건"의 물질적 가치에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과거의 연인과 "많은 눈"이 거쳐간 유물의 본질적 가치로 향한다. 


  이렇게 이탈리아 영화의 해학적 전통을 따르면서 사회적 문제를 낡지 않은 방식으로 골계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난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감독은 영화 속 상징물들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감춰진 문제들을 드러내는데, 완벽하게 짜인 시나리오와 화면 구성은 관객이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자칫 무겁거나 날카로워질 수 있었던 소재는 음악의 사용과 캐릭터 간의 시너지를 통해 한층 부드럽고 가벼워진다. 이로 인해 관객은 영화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에 시선을 돌리거나 거부할 수 없게 된다. 


  영화 속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남성성을 전복하는 방식,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조명하고 소비 중심주의 사회의 천박한 세태를 꼬집는 태도는 에트루리아 문명의 거대한 영향력 아래에서 촘촘하게 설계되어있다. 


  아르투가 지하와 가까워질 때마다 화면이 뒤바뀌는 효과는 그를 ‘키메라’로 나타내는 동시에 아르투와 톰바롤리 일행의 남성적 태도 전체를 뒤집는다. 톰바롤리에서 여성은 "명령을 받는" 위치에 자리한다. 나뭇가지로 수맥을 찾는 행위는 남성의 신체적 발기 상태와 유사하고, 그들이 수맥을 찾고 땅을 파는 등의 주도적 행위를 이어갈 때 유일한 여성 멤버는 끼어들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영화 후반 '조용히 하지 않아서' “매”를 벌고, 혼자 춤을 출 정도로 주도적인 여성인 이탈리아(캐롤 두아르테)에 의해 마침내 그룹 내의 권력 구조에서 벗어난다. 과거 여성이 주도했던 에트루리아인의 땅에서, "Eviva Italy"의 왕국 건설은 “마초” 행위와 실패를 반복하던 톰바롤리 일행과 대비되면서 그들의 행위를 격하시키고 우습게 만든다. (스파르타코의 정체에 관한 것도 동일 맥락에 자리한다.)


  영화 <키메라> 속의 화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각의 상징들이 영화 내용을 탄탄히 받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영적 존재와 전통을 존중하던 이탈리아는 아르투가 사용한 "많은 눈"의 단어를 교정해 준다. 이후 이탈리아가 일하는 플로라(이사벨라 로셀리니)의 집이 화면에 잡힐 때, 카메라는 문 위의 공작 그림이 가진 수많은 눈(꽁지 깃)을 조명한 후, 곧바로 이탈리아의 얼굴을 잡는다. 또한 화면에 갈림길이 등장할 때마다 '살아있는' 등장인물들이 위로 올라가는 길을 선택하는데, 주인공 아르투의 집은 '지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자가 드리워져 '지하'와 유사해 보인다.



  벌써 글이 이만큼 길어졌으나 영화 속 미술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속 상징물과 고고학적 아이디어는 충분히 조명할 가치가 있으며, 감독이 아르투의 눈을 통해 과거 유물의 가치를 되찾고 고대의 것들에 신성력을 부여하는 방식은 일말 감독의 출신지를 떠올리게 만들며 필자를 즐겁게 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미술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시작한다. 기차 안, 잠든 아르투의 옆에 붙은 스티커는 여성 얼굴의 측면 형상이고, 깨어난 그가 같은 칸에 탄 사람들에게 말을 건 소재 또한 얼굴 측면이다. 아르투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이마와 코, 인중의 윤곽을 따르면서, 정확히 회화에서 얼굴 옆선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 지적한다. '옆모습' 대한 회화적 역사는 이집트부터 떠올릴 수 있는데, 필자는 아르투가 ‘잃어버린 연인’을 찾아 헤매는 역할이며, 감독이 직접적으로 이 영화가 “상실과 이별”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했으므로 영화 속 얼굴 옆선을 ‘회화의 기원’과 연관짓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본다. 


장 밥티스트 르노(Jean-Baptiste Regnault), The Origin of Painting, 1785

  플리니우스의 『자연사Naturalis historia』에 의하면 회화의 기원은 기원전 600년 경 고대 그리스까지 올라간다. 코린토스 지역 도공의 딸 디부타데스(Dibutades)는 전쟁터로 떠날 연인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서 연인이 잠들어 있을 때 그의 그림자 형상을 벽면에 따라 그렸다. 이 낭만적이고 애틋한 일화는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다양한 작품을 낳았다.

  연인을 본뜬 형상을 통해 재회를 기원하던 디부타데스와 연인을 찾아 헤매는 아르투는 닮은 면이 있다. 특히 16세기 이후 초상화가 대상의 외적 요소뿐만 아니라 영혼과 내적 세계를 표현하는 데 의의를 갖게 된 점을 고려하면 영화에서 사용되는 측면은 더욱 초상화의 미술사적 의의와 가까워진다. 도굴꾼 동료들이 부장품을 파헤칠 때, 카메라는 무덤 벽면에 드리운 그들의 얼굴 윤곽을 조명한다. 배 위에서 동료들과 스파르타코가 대립할 때 아르투가 보는 것도 그들의 옆모습이다. 그 직후 '내면'을 본 아르투가 무슨 선택을 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영화의 재미있는 대립 구도 중 하나는 고대 예술품의 가치를 금전적으로 환원하는 현대인의 시각과 아무리 노력해도 ‘도굴꾼’으로 남을 수 없었던 ‘고고학자’적 아르투의 미적 가치판단이다. 오랜 여신상 앞에 처음 섰을 때 그의 친구들이 여신상의 재화적 가치에 환호했다면, 아르투의 미적 경험은 그를 고대 여신상의 본 목적, 즉 누군가가 신에게 바치기 위해 경외로서 제작한 그 순간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밀로의 비너스 Venus de Milo


사모트라케의 니케


"보십시오. 이게 오늘날 새로운 밀로의 비너스이자 사모트라케의 니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품을 경매하던 스파르타코(알바 로르바케르)의 대사는 서늘하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를 가졌어요. 하지만 그게 우리 목적이죠.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것에 가치를 매기는 것이요.” 어떤 사람들은 스파르타코를 악역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고대의 미술품을 미술관에서 편안히 누리고 있는 우리가 그녀의 태도를 '악'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우리는 결국 어떻게 도달했는지 모를 그들을 미술관에서 “돈을 내고 보려고” 하는 사람들 중 일부이며, “얼굴이 없다는 것은 우리 중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하는 ‘전문가’의 감언이설에 현혹되는 사람들이 아닌가? 실상 그것의 뒤에 금전적 톱니바퀴가 자리하고 폭력이 내재되어 있어도 말이다!


  스파르타코는 아르투에게 “좀도둑인 척해도 당신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들이 결과적으로 합치할 수 없었던 것은 두 사람이 생각하는 미술품의 ‘가치’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품과 자본은 떼어놓고 판단하기 민망할 정도로 얽혀있다. 특히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현대인이 예술 작품을 다룰 때의 가치 판단과 미적 경험이 감독이 조명하던 고대인들과 다른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미술관을 ‘작품들의 무덤’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술관이 ‘교육의 장’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문제는 정치사회적, 역사적 문제와 얽혀 더는 옳고 그름을 가를 수 없는 난제지만, 한 번쯤은 아르투처럼 전부 잊고 고대인이 가졌던 경외와 숭고의 감정을 체험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혼란스러운 오늘날 우리에게 예술의 본질적 가치에 대해 질문할 것이기 때문이다.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우리가 잊고 있던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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