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라, 두려움이 나를 잡지 못하도록
"우리는 바다 위의 배고, 해안선이 어딘지 몰라."
여기 한국인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자랑스럽게 손꼽는 위대한 선지자이자, 영원히 사랑받을 남자가 있다. 한국계 감독 어맨다 킴은 다큐멘터리 영화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티비>를 통해서 고향을 떠나 평생을 방황했던 고독한 영혼을 지닌 예술가의 생애를 추적한다.
백남준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한국에서 태어나 3남 2녀 중 막내였다. 그의 아버지가 당대 최대의 섬유업체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매우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하지만 어린 그에게 아버지의 친일적 행보와 시대상은 이질적으로 느껴진 듯하다. 학창 시절 마르크스주의와 월북 시인들의 시에 몰두하며 아버지와 잦은 마찰을 빚었던 그는 어느 날 피아노 선생님을 통해 아방가르드 작곡가 아널드 쇤베르크를 알게 되었고, 이 운명적인 만남은 예술가 백남준의 초석이 되었다. 백남준은 한국을 떠나 영국, 독일 등에서 오랜 유학 생활을 했다. 그들은 그에게 음악적 지식과, 철학 이론, 피아노 기술 등을 가르쳤지만 동시에 그는 언제나 이방인으로서의 고독과 외로움에 고통받고 있었다.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도 타지에서는 결국 ‘잘 모르는 나라의 가난한 동양인’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동일한 관심사로 아방가르드 예술을 실천하던 예술가들을 만난 백남준은 이후 뉴욕으로 이주하였고, TV 방송, 인터넷의 메인이었던 미국에서 새로운 매체를 도구로 한 새로운 예술의 물살에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된다.
영화는 백남준의 연대기를 재료로 한 1시간 50여 분가량의 거대 콜라주 작품처럼 제작되었다. 감독은 치밀한 조사와 방대한 자료를 통하여 "희귀한 사람"이자 그의 예술적 시도만큼 "미스터리어스한 인물"이었던 백남준을 조명한다. 어맨다 킴은 백남준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회고와 그의 작품, 인터뷰 영상 등의 시각 자료들을 종합하여 짧게 잘라 교차로 편집하였는데, 여기에 빠른 속도의 화면 전환 기법이 어우러지면서 결과적으로 한 화면 안에 다양한 정보 값이 존재한다. 이러한 효과는 자칫 관객에게 어지럽게 전달될 수 있으나, 폭넓고 많은 정보를 상호연결시키며 효과적으로 정리하면서, 다큐멘터리 영화가 지루하다는 편견을 극복한다는 장점이 있다. 말 그대로 ‘지루한 틈이 없는’ 영화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술가 백남준이 ‘미스테리한 예술가’라는 별명의 소유자이며, 그가 생전 특유의 재치와 선견을 통해 인터넷에 주목하여 그의 작품에 <전자 초고속도로>(1995)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을 고려했을 때, ‘전자 초고속도로’와 같은 빠르고 광활한 편집 방식은 예술가의 의도와 아름다운 형태로 교차한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것이 ‘백남준 다큐멘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조명 방식이 아니었을까.
또한 놀라운 것은 우리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백남준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이 단편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의 업적은 이미 예술계의 한 획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비디오 아트의 대명사로 통용된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이토록 치열하고 위태로운 도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은 명성의 광휘에 가려져 있는 부분이다. 백남준의 위상을 떠올릴 때, 그가 뉴욕에서 일주일 치 식사를 통조림 캔으로 해결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영화 속 그가 보여주는 별난 탐구 정신과 추진력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력과 즐거움을 느끼게 하지만, 동시에 이방인으로서 가졌던 추방에 대한 불안함과 혼란기의 조국을 향한 두려움은 예술가를 둘러싼 재치 있는 인터뷰들로도 숨길 수 없이 전달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원한 이방인이었던 그를 한국계 감독인 어맨다 킴이 조명하고 한국계 미국인 배우 스티븐 연이 영화 내레이션에 참여한 것은 상징적이다. ‘집’이라는 개념이 과거에 비해 확장되고 모호해진 오늘날, 그들이 공유하는 디아스포라 정서는 현대 사회 우리가 겪고 있는 집에 대한 혼란과 집단 속에서 느끼는 고독에 접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