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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승환 Mar 27. 2024

소재

    가장 관심 있어하는 소재. 가장 좋아하는 소재. 국문과 다닌다고 말할 때, 극작과 재학 중이라고 말할 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다. 어떤 작가 좋아하세요? 어떤 책 좋아하세요? 그럼 나는 대답 잘 못한다. 이것저것 많이 읽는다고 하기에는 떠오르는 게 없어서 둘러대는 것 같아서 싫었고, 그런 질문에 답하고자 관심 없는 유명한 책 하나 읽고 너스레 떠는 것은 더 싫었다. 그들에게 부산 사는 워킹맘이 산후조리하며 받은 설움에 대한 글을, 일찍이 외동아들과 사별하여 가정이 무너진 자영업자의 글을 좋아한다고 소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대답 안 하고 만다. 대충 둘러댈 법도 한데, 안 됐다. 그때부터 어디 가서 무슨 과 다닌다고도 말 안 하게 된다. 꼬리 질문이 달릴까 봐, 근데 답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적성에도 안 맞고 재능도 없는 거 남들 따라 대학 간 것처럼 보일까 봐, 펑펑 놀면서 대충 졸업이나 한 것처럼 보일까 봐, 그래서 나를 미워할까 봐, 말 안 하게 된다. 


    솔직히 과제 보고 많이 당황했다. 지난날 받아 온 질문들이 스쳤다. 어쩌면 돌려받는 것일 수도 있겠다.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수많은 질문이 있었는데, 수많은 대화가 오갔는데, 그때마다 없어, 싫어, 몰라, 묵묵부답. 하여튼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미루다가 이렇게 변을 당한 것이다. 클래스룸 과제란에 문서를 펼쳐놓고 몇 번을 쓰고 지웠는지 모르겠다. 단편소설 어떤 책을 좋아해요, 추리할 수 있는 범죄소설 좋아해요. 이런 걸 써봤는데, 없는 얘기 쓰려니까 쓰다가 막히고, 쓰다가 막히고. 짜증 나서 관뒀다. 그래서 단어로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풀어쓰기로 하였다.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는 거니까 한 번 써보자 했다. 이참에 써보고 괜찮잖아? 그럼 앞으로 이렇게 얘기하고 다니면 되는 거야. 했다.


    우선 나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단 한 명도 등장시키지 않기 위해 사물의 입장에서 글을 쓴 적도 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사람이 너무 많이 나온다. 오히려 더 많이 나온다. 길가에 소화전도, 학교의 정수기도, 사람을 보지 않는 것들이 없다. 하루종일 사람을 본다. 콘센트의 뒷면, 화장실 환풍구의 안쪽. 이런 것들은 진정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겠지만 문제는 나도 본 적이 없다. 정확히는 관찰해 본 적이 없다. 이입해서 상상하기가 귀찮았다. 


    그래서 나만 등장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 하나 정도는 등장해도 괜찮겠지. 소화전은 내가 뭐라 하든 매일 그곳에서 사람을 목격하겠지만 나는 나의 의지로 사람을 보지 않을 수 있다. 안 봐도 된다. 모든 끼니는 배달로 해결하며 아무도 없을 때 복도에 나와 음식을 집어 가기만 하면 된다. 잠을 잘 때도 혼자 잘 것이며, 일어날 때도 혼자 일어날 것이다. 할머니의 안부 전화, 엄마의 다그치는 전화. 보는 게 아니니 상관없다. 그러다 배부르고 할 거 없으면 지금 내 눈에 보여지는 것들을 관찰한다. 그제서야 보는 것이다. 얼마고 쳐다보고 있으면 이따금 연상되는 이야깃거리가 있다. 그럼 그걸 나 혼자 쓴다. 혼자 쓰고 혼자 읽는다. 


    그러니까 나는 뭐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누구나 겪고 있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구도 끌어들이지 않고, 누구도 만들어낼 필요 없는 글. 작가는 등장하지 않지만 작가가 전부인 글. 같은 것을 보고 떠오르는 다른 날의 생각을 따져보는 것. 모든 것을 천천히 낯설게 보는 것. 내가 쓰는 것도 좋고 타인의 시선과 입장이 담긴 글을 읽는 것도 좋다.

    사실 글은 원래 가짠데. 그래서 재밌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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