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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승환 May 09. 2024

부고(訃告)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놀라긴 했지만 실감하진 못했고 실감하지 못했으니 슬프지도 않았다. 수요일 오전 아홉 시에 소식을 듣고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잠옷과 충전기만 챙겨 터미널로 향했다. 오랜만에 구두를 신어서 그런지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벌써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오후 한 시차를 타고 강원도로 향했다. 이번 주에 예정되어 있던 약속 세 개를 내리 취소하고 달리는 버스 창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팽개치고 떠나고 있는 나의 모습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죽음이 실감되기 시작했다. 죽음을 마주하러 가는 길, 나는 이 길을 달리는 버스가 영원히 도착하지 않길 바랐다.


    그의 사진 주변에는 흰 국화가 빽빽이 놓여 있었다. 빈소에 들어가 절을 하는데 두 번째 절을 올릴 때 울컥하는 마음에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엄마가 알려주는 대로 향을 피우고 빈소에 붙어있는 방에 들어가니 할머니가 계셨다. 다음엔 언제 오냐, 다음엔 언제 오냐 버릇처럼 물었는데 이제 영 못 보게 되었네. 어절마다 울음이 맺혀 끝을 흐리며 할머니가 말했다. 대답을 하면 울 것만 같아 아무 말하지 않았다. 준비된 상복으로 갈아입고 빈소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까지 장례식에 참석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너무 어렸거나 많은 추억을 나눈 이가 아니었기에 진정 죽음을 실감하고 애도했던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상복을 입고 팔뚝에는 완장을 두르고 그가 가는 모든 길을 배웅했다.


    조문객이 없는 한산한 낮 시간에 엄마 차를 끌고 할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가자 거실 티브이 앞에 그의 휴대폰이 놓여 있었고 그 뒤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고 그가 사용하던 욕실의 작은 의자에 앉아보고 그가 항상 앉아있었던 소파에 앉았을 때 나는 울음을 삼키지 못했다. 처음 느껴보는 슬픔에 어찌할 바를 몰라 거실을 돌며 발을 굴렀다. 바쁘다고 거짓말하던 입에는 침과 눈물이 고름처럼 맺혔다.


    오후부터 조문객이 오기 시작하기에 나는 다시 식장으로 향했다. 식장에 나를 포함한 손주는 모두 열두 명이었다. 우리는 조문객이 오면 음식을 준비하고 상을 치우는 일을 하였다. 조문객은 얼마나 많고 술은 또 얼마나 마시는지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바빴다. 바쁠 때면 잠시라도 그를 잊고 슬픔을 잊고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가끔 기둥 너머로 그의 영정이 보일 때면 빈소를 들르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식장 안으로 조문객이 꾸역꾸역 밀려 들어왔다. 식장 한 구석에선 등산 자켓을 입은 노인들이 불콰해진 얼굴로 노래를 부르고, 그 옆에선 친지들이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아찔하게 쌓아놓은 쟁반들 뒤로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고, 한쪽 모퉁이의 대형 에어컨은 웅웅 거리며 찬바람이 보내고 있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누군가 찾아온데도 안개에 가려 결코 못 알아볼 것 같은 밤. 수백 명이 왕왕거리는 식장에서 모두 소리 높여 떠드는 가운데 아무 말도 않는 사람은 고모와 나 둘 뿐이었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영화 『헤어질 결심』 (2022) 中


    나는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었다. 잔잔할 때는 친척들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시덥지 않은 농담도 하지만 파도가 칠 때에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기도 하였다. 영원히, 두 번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떠오르면 나는 그 사실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발인 전 날 집으로 걸어가던 길에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아버지랑 같이 잔 적이 있었던가? 내가 그와 보낸 밤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그와 나란히 누워 잠에 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일이면 다시 그와 함께 잘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집에서 이불과 베개를 챙겨 식장으로 향했다. 식장에 불은 모두 꺼져있었고 몇 분만이 잠자리를 준비하고 계셨다. 나는 빈소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옆으로 누워 그의 영정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하염없이 나와서 도무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서 찬물로 세수도 해보고 사진을 보지 않기 위해 안경도 벗어봤지만 헛수고였다. 나는 그냥 휴지 몇 장을 눈 밑에 받치고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밤늦게까지 울어서 눈 두 덩이는 퉁퉁 부어있었고 두 시간밖에 못 잔 탓에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정말 꼴 보기 싫었다. 그런 눈을 하고 친지들을 보려니 슬픔을 증명하려 드는 것만 같아 괜스레 눈치도 보였다. 


    발인 날 아침은 많이 피곤했다. 전날 밤을 꼴딱 새우고 5시가 다 되어서야 잠들었는데 엄마아빠가 7시 반에 나를 깨웠기 때문이다. 두 시간밖에 자지 못한 채 일어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빈소에서 잔 탓에 눈을 뜨자마자 흰 국화와 그의 영정이 보였다. 다시 밀려오는 슬픔에 피로는 금세 잊혀졌다. 마지막으로 식장에서 나오는 불고기와 육개장을 먹고 발인을 준비하였다.


    장례지도사는 가장 큰손주가 영정을 모실 것인데 위패는 누가 모실 것이냐고 물었다. 아빠와 고모는 네가 모시는 것은 어떻냐는 듯이 눈짓을 보냈지만 나는 손주 열두 명 중 여덟 번째였기에 내가 모시는 것이 예(禮)에 어긋나 보일까 쉽사리 말하지 못했다. 결국 장례지도사의 의견에 따라 둘째 손주가 모시기로 하였다. 식장 입구에 우리는 긴 행렬을 만들었다.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는 첫 째 손주님과 둘째 손주님이 가장 앞에 섰고 그 뒤로 항렬에 따라 줄을 지었다. 나는 항렬에 따르기보다 할머니와 함께 걷고 싶어 맨 뒤에 섰다. 발인 장소로 향하는 버스가 있는 곳까지 갔는데 감사하게도 어제 보았던 조문객들이 우리를 배웅하며 슬픔을 나누고 있었다. 버스에 관을 싣고 나 또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충청북도 제천에 있는 화장터까지 40분 정도가 걸린다고 하였다. 발 밑에 그를 두는 것이 영 어색했다. 그의 옆에서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바퀴 소리가 야속했다.


    화장터에 도착하여 아까와 같이 행렬을 짓고 입구로 들어갔다. 화장터에 들어가서 그가 화장장으로 들어가는 모든 과정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 혹은 나의 이기적인 집착이 아닐지 하는 마음이 주저하게 만들었고 입구에 커다랗게 쓰인 "사진, 동영상 촬영금지"가 단념하게 만들었다. 화장장에 들어서서 추모실로 안내받았다. 아주 협소하고 작은 공간이었는데 한쪽이 통유리였다. 유리를 통해 화장을 진행하시는 분 (어떤 명칭이 있을 텐데 잘 모르겠다)이 할아버지의 관을 모시는 장면을 모두 볼 수 있었고 뜨거운 불이 올라오는 모습이 보이자 유리창의 블라인드가 내려갔다. 나는 이곳에서 가장 많이 울었고 소리 내어 우는 할머니의 모습도 이곳에서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유족을 위한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서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매점이 딸려있는 곳이었는데 라면이나 과자 등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휴식 공간 대신 추모실로 향했다.


    추모실에는 뜻밖에도 고모가 앉아 있었다. 뜻 밖이라는 게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 데 있었다는 것이지 그가 그곳에 앉아있는 것에 놀랐다는 것은 아니다. 안 그래도 좁은 공간에 블라인드까지 내려있으니 조금 답답했다. 블라인드 아래에는 그의 영정과 위패가 있었고 고모와 나는 영정의 표정이 너무 무표정이다, 크기가 너무 작게 나왔다 와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화장이 이루어지는 한 시간 반동안 우리는 그와 나눈 추억에 대해 이야기했고 할머니에게 더 잘하자는 다짐을 했다. 화장이 끝날 때쯤 되자 장례지도사가 휴식 공간에 있는 가족들을 불렀다. 그가 유골함으로 모셔지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고 장지로 향했다.


    장지는 영월에 있는 선산이었다. 우리 엄마 아빠의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부터 모셔진 산이라고 한다. 유골함을 땅 속에 넣고 흙으로 덮었다. 흙을 다지는 발길질이 분주했다. 시답지 않은 농담이 오고 갈 때마다 혀를 삼키고 싶었다. 다져진 흙 위로 대리석 현판이 올려지고 모든 것이 끝났다. 모두 돗자리 위로 올라가 음식과 술을 마시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차가운 대리석 위에 물었다. 어디로 가셨나요.


    쪼그려 앉은 할머니와 고모의 정수리 위에 양산을 덮었다. 더 이상 슬프지도 그립지도 않았다. 매미 울음소리가 요란했다. 흔들리는 나무 소리가 차가웠다. 나는 서지도, 앉지도 못한 채 마치 벌서듯 어정쩡한 자세로 산 아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양산을 쥔 손이 발발 떨렸다.


*김애란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 2017) 「건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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