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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승환 May 09. 2024

말무덤

    말채로 묻었다. 질곡없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봉긋하게 솟아 오른 언덕 위로 대못처럼 박힌 차가운 묘석.* 그 뒤로 착실하게 묻어 놓은 단정하고 깨끗한 말무덤.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기색도 없이 아름답고 평화롭다.

    무덤을 파헤치려 드는 도굴꾼을 막기 위해 나는 죽어서도 죽지 못했다. 나무와 짚으로 엮은 울타리로 시작해서 진흙으로 쌓아올린 높다란 벽. 철근이 박힌 콘크리트. 수명을 급여로 받아가는 세상에서 제일 가는 보안관. 뭐 이런 것들을 준비해 놓았지만, 이런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 세상의 것들은 나의 촘촘한 보안망을 잘도 뚫고 지나가며 모든 것을 흐트러 놓았다. 보안관의 고함. 앵앵거리는 사이렌 소리. 부서진 벽. 누군가 벽을 타고 오르는 데 사용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굵은 밧줄. 벽에 남아 있는 별안간의 더러운 진흙 발자국. 내가 그것들을 제자리로 돌려 놓고 있는 동안 나의 무덤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 무덤이라는 게 사람이 묻힌 곳이 아니어서 국가와 정부의 보호도 받지 못할뿐더러 파헤치려 들어도 아니 실제로 파헤치더라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유도할 수 없다. 내가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지켜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날은 그랬다. 수명이 아까워 세상에서 제일 가는 보안관을 집으로 돌려 보냈고 붉게 새어 나오는 불빛이 왜인지 불쾌해서 사이렌을 꺼버렸다. 어젯밤 누군가 도굴을 시도한 흔적들, 그러니까 벽에 걸린 굵은 밧줄, 보안의 허점을 보여주는 발자국들도 지우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하염 없이, 도굴꾼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마치 내가 도굴꾼이 된 양, 나무와 나무 사이에 숨어서 말무덤을 지켜보았다. 지켜만 보았다. 그곳에 누군가 침입하고 그래서 무덤이 파헤쳐서 엉망이 되고 더러워져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수풀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들이 두고 간 것들을 챙겨 들었다. 등 뒤로 부끄러운 바람. 비릿한 비 온 뒤 흙 냄새. 다그치는 고함 소리.* 저멀리 보이는 세계. 그곳은 목격된 세계. 그곳으로 갔다.

    가진 것은 말밖에 없었다.


*서효인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정용준 발문 「이야기의 바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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