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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돌 Jul 17. 2024

넌 어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어


이 글은 창원에서부터 시작된 행운의 편지로 …



방금 휘갈긴 문장은 남들에게 내 글을 숨기기 위한 은폐용이다. 특히 아빠한테만은 기필코 숨겨야 하는 글이다. 한글로 적혀있지만, 외계어 같은 이 글은 세종대왕님께도 반드시 비밀이어야 했다. 아빠와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날은 유난히 단어들이 유치해지고 치사해지는 건 기분 탓일까.



나는 오늘도 글로 도망쳤다. 





탁. 타닥. 타다닥. 타자 소리가 커지고 거칠어진다.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차가운 물방울이 가득 맺힌 물컵을 들었다. 어라. 내가 언제 다 마셨지. 미지근한 생수로는 턱도 없어 얼른 얼음물을 한가득 가져온다. 손가락을 현란하게 오므렸다 피면서 숨을 돌린 지 3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린다. 무기력, 우울, 불안, 걱정이 뒤섞인 화살에 다시 맞서야 한다. 난 지금 화형장의 한가운데 서있다. 머리속 하늘에서 시작된 불화살들은 마음 안으로 우박처럼 쏟아진다. 느려터진 손끝은 불화살 3개 중 1개 꼴로 겨우 막아낸다. 숨소리도 안 내고 화살을 쳐내길 1시간...드디어 불길이 잡히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는 것 같아 숨을 크게 들이켜본다. 차분히 눈을 감으니, 집 나간 줄 알았던 이성이 돌아와서 얼쩡거린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정확히 어떤 말을 아빠한테 전하고 싶은 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다. 내가 나에게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 나는 감정적으로 거침없이 휘갈기던 페이지를 닫고, 새로운 백지를 열었다. 평소엔 내 머릿속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지만, 오늘은 글로 써야 한다. 명료하게 따져봐야 하니까. 이건 마치 스스로에게 보내는 편지와도 비슷하다. 다정하게 위로하며 안부를 전하는, 냉철하게 분석하며 조언하기도 하는, 나만을 위한 편지. 얼음물로 다시 목을 축이며 아빠와의 대화를 생각해 보는데, 목구멍에서 날 것의 한 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난 아빠가 아니다.’     


 

아빠가 평소에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너는 아빠 딸이어서… 아빠 머리를 닮아서… 아빠 유전자… 약 20년 넘게 들어온 레퍼토리는 익숙하지만, 또다시 위화감을 느낀다. 난 정말 아빠의 말하는 대로의 사람일까? 아빠에겐 정답일지라 나에겐 아닐 수 있지 않나? 아닌가? 분명 아빠의 모든 말이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흔들렸고, 나의 중심이 점점 작아졌다. 그런 스스로가 정말 쪽팔렸다. '과연 넌 성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긴 한 거냐.' 언뜻 들리는 바람빠진 웃음소리는 비웃음을 닮아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맑은 물을 한 모금을 들이켰다. 26년 인생이 모여 정립되는 가치관이 단 몇 분만에 모두 담아질 리가 없었기에, 미완결 쉼표를 찍었다. 아직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나의 세계는 여전히 불안불안했지만, 나는 가뿐한 손놀림으로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우린 각자의 삶 살아가는 고유한 인간인걸요.

하지만 아직 제가 어른이 되기엔 멀었다는 건 인정해요. 근데 도망치진 않을거에요.'

 









작가의 말
 : 불향 가득한 글을 썼는데, 지금 밖에는 비가 오네요. 막걸리에 감자전 어떠신가요. 아 김치전도... 




작가의 이전글 상경이라 쓰고, 독립이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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