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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화래진 Apr 21. 2024

알바 중 취객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2023.08


어제는 유독 불안한 날이었다. 전날 잠을 한 시간에 한 번씩 깨기도 했고 꿈에서 사정없이 사람들이 누군가에 의해 죽어나갔다. 칼로 찔리거나 낭떠러지에 밀리거나 얼굴이 바닥에 짓이겨졌다. 잔인한 꿈에서 깨니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복싱을 갔더니 코치님이 내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다며 집으로 보냈다. 이상하다 잠도 잘 잤고 밥도 잘 먹었는데..? 집에 오자마자 다리가 풀리고 몸이 무거웠다. 코치님이 나보다 내 몸상태를 더 잘 알았다는 사실에 민망했다. 오후에는 편의점 알바가 있어서 갔다. 15분 거리에 있는 그곳은 상업이 반 주거가 반인 곳이었다. 사람도 많지 않고 진상손님도 거의 없었다. 새벽 1시에 끝나는 편의점이라 가끔은 무서웠지만 무서울 사건은 없었다. 아니 없었었다.


어제는 자정이 지나 물건을 채워 넣고 있었다. 문에 달아둔 종소리가 들려 빠르게 카운터로 이동했다. 어서 오세요 라는 내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쌍욕을 뱉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욕설에 몸이 굳었다. 지금 내게 해를 가하지 않아도 어쩐지 곧 피해를 입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포스기 위 긴급버튼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동시에 핸드폰을 켜 녹음버튼을 눌렀다. 욕설을 뱉던 술 취한 아저씨는 50대 후반정도로 보였다. 뭣 같은 일이 다 있다면서 온 매장을 큰 목소리로 욕을 하며 돌아다녔다. 중간중간 내게 무슨 라면이 맛있냐 물어서 대답은 했지만 취객은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럴 거면 왜 묻는 건가.


술 취한 아저씨는 카운터에 물건을 6개 정도 쌓아놓고 봉투를 달라고 했다. 계산을 해서 봉투에 담으니 오만 원권을 줬다. 빨리 아저씨가 갔으면 하는 마음에 재빠르게 거스름돈을 꺼내고 있었는데 영수증을 보여달라는 거다. 영수증을 보더니 본인이 산 게 아니라며 다시 계산해 달라고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말했다. 이미 몸의 절반이 카운터의 반 이상을 지배했고, 나는 더 이상 넘어오지 않기를 바랐다. 다시 계산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물건을 바꿔댔다. 반품업무와 결제업무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거스름 돈을 다시 계산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내게 다가오는 상체가 너무 무서워서 서둘러하던 중이었다. 순간 들려오는 소리에 바쁘게 포스 기를 누르던 손이 멈췄다.

언제 끝나?

끝나고 나랑 데이트하자.


머릿속이 빠르게 돌처럼 굳었다. 이마에 누가 콘크리트를 덧칠한 것처럼 머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느리게 뛰더니 손발이 냉탕이 되었다. 심각하게 수치스러웠다. 주춤하면 안 될 것 같아 싫습니다. 됐습니다. 를 연신 외치니 눈을 맞추자며 내게 자꾸 다가왔다. 싫습니다를 또 연신 말하며 뒤로 주춤하는 대신 안녕히 가세요를 외치니 취객이 나갔다. 갑자기 심한 두통이 일더니 취객이 문 앞에서 기다릴까 봐 문 쪽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의자에 앉자마자 녹음을 확인하니 중간에 위치를 바꾼다고 녹음을 다시 눌러 중요한 부분에서 녹음이 끊겼다. 경찰에 신고하려고 일부러 켜놓았는데 좌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신고할걸, 아 모르겠고 주먹이나 날릴걸, 그냥 침이라도 뱉을걸 연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짜증을 내다가 이내 들어오는 손님들 모두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기사에서 본 가해자의 사진과 다들 동일인으로 보였고 혹시나 싶어 손에 물건 박스 뜯는 용도의 칼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그렇게 두 명의 손님이 지나갈 때쯤 한 여성손님이 내 핸드폰을 빌렸다. 도어록이 고장 나 태풍 속을 헤매던 여성분은 이 편의점까지 오게 됐고 나는 그 여성분으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천천히 전화하시라고 하고 나는 서둘러 마감을 했다. 그 여성분이 없었다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익숙하던 집 가는 길이 무서워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타면서도 그 취객이 나를 기다리지는 않을까 무섭고 두려웠다. 맞은편 바를 위안 삼아 여차하면 저곳에 들어가야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다행히 취객은 주변에 없었고 나는 택시를 타면서도 기사님을 의심해야만 했다. 집 앞에서 내리며 달은 걸음으로 집까지 올라갔다. 집에 와서도 진정이 안 돼서 물을 한잔 마셨다. 이상하게 명치가 두둑하니 머리에 있던 콘크리트가 명치로 내려간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내가 뭘 잘못했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의미 없는 자문이라 생각에서 지웠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일은 눈뜨자마자 점장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시간을 바꿔달라고 말해야지라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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