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자부하는 것 중 하나는 ‘나를 잘 안다'는 것이었다. 종종 친구들의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라는 말을 들으면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모르면 누가 안다는 거야?, 어떻게 자기 마음을 모르지?
요새는 [누가 자기 마음도 몰라]의 [누가]가 되었다. 현재의 시간을 쫒기에도 벅차 나의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후순위로 두는 하루가 많아졌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나흘째에는 정신이 퍽 든다. 일기를 안 쓴 지 나흘이나 됐네.
갑자기 펼쳐든 일기장을 보니 죄다 아침은 피곤하다. 회사에서 일했다. 저녁엔 친구를 만났다 혹은 운동하고 왔다. 졸리다. 잔다ㅂㅇ 이런 똑같은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그날 내가 뭘 듣고 뭘 봤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에 대한, 나에 대한 이야기가 쏙 빠져있었다. 내 일기장은 어제가 내일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나를 위해 매일이 다른 날이라는 사실을 기록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록일지였다. 내가 나를 이렇게나 등한시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 부끄러워졌다. 내가 키우는 식물 이파리의 일부만 말라도 마음이 철렁해 안절부절못하면서 나를 돌보는 일을 그것보다도 더 살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극단적으로 몰고 갔다.
이 일은 나랑 안 맞는 것 같다. 이렇게까지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그만큼의 보람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일이 좋고 잘하고 싶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극단적인 생각의 마침표를 찍고 내게 다시 집중하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30대에 신입으로 들어가서 긴장하며 6개월을 보내느라 만성위염과 위경련으로 4킬로가 빠져 체력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도피하듯 읽은 기억도 안나는 몇십 권의 책들,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 들을까 봐 상사의 모든 말에 경직하며 들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니 마지막에는 파도가 지나간 모래성처럼 마음이 그랬다. 나를 다독이는 일을 미루니 열심히 쌓은 내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1-2년 죽은 듯이 일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근데 뭐가 되었던 나를 죽여가면서 해야 할 일은 없던 것이다. 나를 잃으니 하는 일에 목표를 느끼지 못하고, 목표를 잃고 일을 하니 무얼 위해 이 시간을 버티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만 늘어갔다. 나는 마치 당연한 듯이 야근을 했다. 그게 자연스러워지면서 업무시간 내에 무언가를 끝낼 생각을 못했다. 습관이 되니 몸은 지치고 체력은 안되고 다음날까지 피곤으로 이어져 디자인에 대한 흥미까지 잃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됐다. 자연스럽게 집중력도 떨어졌다.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것보다 최대한 업무시간 내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현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의 시간을 늘리는 것과 업무시간 내에 그날그날의 목적을 달성하고 마무리 짓기로 했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빨리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머리를 쓰는 일을 게을리하면서 몸만 축냈던 것 같다. 퇴근 후의 나의 시간에 대해 소홀했다. 나와 잘 지내야 디자인과도 잘 지낼 수 있는 것을 잊고 산 게 아닐까, 어쩌면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