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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화래진 Apr 24. 2024

서른한 살, 열한 살한테 위로받다

2023.09


 종종 듣는 감사한 말 중 하나는 '너는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사람이다.'라는 말이다. 나는 대학원 입학 때 연구실 친구들에게 처음 느껴본 적이 있었다. 낯선 곳에서의 한 줄기 빛 같았던 그들의 존재가 내게 위로가 되었었다. 그 외에 내게 존재만으로 위로가 된다는 것은 조금 낯선 문장이다. 뭐 당연히 좋은 말이겠지. 그러던 내가 오늘 조카에게 그런 위로를 받았다.


내가 요새 힘들긴 힘든가 보다. 일기도 못쓰겠고 책을 읽어도 명치가 뻐근해지는 게 내과를 방문해야 하나 했다. 오늘은 밥을 몇 술 뜨지도 않았는데 속이 메스꺼워 나도 모르게 어떤 것을 잉태한 것은 아닌가 한참 실없는 생각을 했다. 낳으면 알일지, 나는 포유류니까 생물로 바로 나와버릴지, 부모님께는 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하다가 상상임을 인지하고 이내 관두었다.


어제는 기분이 꿀꿀하고 하도 울적해서 여기저기 전화를 했다. 친구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한결 나았지만 그래도 영 구린 기분을 지울 수가 없어 감정에 이름을 붙여보기로 했다.


우울감, 무기력감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전화를 받지 못했던 친구들에게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몸이 안 좋았던 친구도 있었고, 방금 내 부재중 연락을 확인한 친구들도 있었다. 장문의 문장을 써 가며 잘하고 있다는 친구도 있었고 숙취가 대박이라는 문장도 있었다. 하등 쓸모없다고 생각한 카톡이 이래서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구나. 내심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밑도 끝도 없어서 노트북을 남의 짐 훔치듯 쌔벼 나와 집 앞 카페로 나왔다. 카톡이 쉴 새 없이 왔다. 언니가 자식들 체육대회라며 사진을 보낸 것이다. 나는 한참을 보다가 이건 체육대회가 아니라 파티네 파티를 연달아 외쳤다. 시골이라 성대하고 다양한 가족구성원들이 왔다. 지역대축제라고 해서 나는 그냥 속으로 파티라고 부른다. 어쩐지 나도 갔어야 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언니가 연신 아이들이 1등이라고 숫자를 이리도 강조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1등 좋아해서 어쩌지.. 별 같잖은 걱정을 하다가 조카한테 카톡 했다. 오늘 체육 파티했더라, 재밌게 놀았어? 내 카톡을 본 조카는 할 말이 많다며 바로 페이스 타임을 때렸다.


이모~! 조잘조잘 오늘 있었던 일을 막 떠드는 조카를 보면서 한참을 웃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조카가 대뜸 물었다. 이모는 내가 매일 안 보고 싶어? 라길래 나는 매일 보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가 오늘 계주에서 1등 하면 이모한테 자랑해야지라고 내 생각을 했단다. 그러면서 자기도 매일 내가 생각난다고 덧붙였다. 몰랐다. 몰라서 마음이 뭉클했다. 세상에 나를 매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엄마, 아빠 말고 또 있다니, 달리기 선 밖에서 내 생각을 하는 유일한 존재라니. 내게 이런 존재가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신이 사랑을 못 믿는 나에게 그래도 한 번은 사람을 사랑해봐 하고 던져준 게 조카인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울렁임이, 마음에 거대한 물들이 넘실거렸다. 그리고 내가 물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데 널 서울로 납치해 와도 될까, 정중하게 물어보니 그래주었으면 좋겠단다. 통화한 지 10분 만에 내게 이런 감동을 준 조카가 너무 고맙고 귀했다. 아 존재만으로 위안이 된다는 게 이런 마음이었구나. 절대 빈말로 내게 해준 말들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다음에 이 말을 들으면 꼭 고맙다는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 이런 존재인 나의 조카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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